[오피니언리더] 역사의 보은 잊지 않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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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墓園)에는 417명이 잠들어 있다. 이곳에는 선교사, 언론인, 군목, 군인, 그 가족 등 다양한 사람들이 묻혀 있다.

주요한 분들을 살펴보면, 가장 먼저 안장된 분이 J.W 헤론으로, 1885년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알렌, 언더우드와 함께 제중원에서 의사로 일하다가 열악한 환경 때문에 질병에 걸려 5년 만인 1890년에 세상을 떠났고 여기에 잠들어 있다. 그리고 H.G 아펜젤러로, 한국 근대교육과 감리교의 초석을 놓았으며,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데에도 큰 공을 세웠다. 그러다가 1902년 해상에서 선박사고로 순직하였다. R.B 켄드릭은 여성으로 개성에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아픈 아이들을 헌신적으로 간호하다 과로로 1908년 2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M.F 스크랜턴 대부인도 이곳에 있는데, 그녀는 이화학당을 설립하여 근대 여성 교육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조선에서 24년 동안 헌신하다가 1909년 세상을 떠났다.

언론인으로 유명한 E.T 베델도 이곳에 묻혀 있는데, 그는 영국인이면서 구한말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여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한국인을 세계에 대변하는 역할을 하다가 1909년 3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또 빼놓을 수 없는 H.G 언더우드도 있는데, 그에게는 ‘한국 기독교 선교의 개척자’라는 칭호가 붙는다. 그는 새문안교회, 경신학교, 연세대학을 설립했으며, 평생 성경 번역에도 힘썼다. 양화진에는 그를 비롯하여 7명의 가족이 안장되어 있다.

이곳에는 E.A 길보른도 있다. 길보른은 3대에 걸쳐 동양선교회 선교사로 한국 성결교회 정착에 기여하였다. 그리고 1928년 세상을 떠나게 된다. F.M 브로크만도 빠질 수 없는데, 그는 YMCA를 통해 조국을 잃고 실의에 빠진 청년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당시 학생회 간사였던 이승만과 함께 전국을 순회하면서 학생회를 조직하였다. 그런데 과로로 인하여 1927년 쓰러져 본국으로 돌아갔으나 1929년 세상을 떠났다. W.M 베어드는 평양에 숭실대학을 세웠고, 1931년 세상을 떠났는데 양화진에는 두 부부의 기념비와 두 아들의 무덤이 있다.

그리고 J.S 게일도 있다. 그는 캐나다의 평신도 출신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천민 출신도 장로로 세우고, 한국문화를 서양에 널리 알리는데 힘을 쓴 한국학의 선구자로 불린다. 그는 1937년 세상을 떠났다. R.A 하디는 의료선교사로 왔다가 나중에 평양대부흥의 시발점이 된 1903년 원산부흥운동의 주역이었고, 감리교신학교와 협성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1949년 세상을 떠났고, 양화진에는 그의 두 딸의 무덤이 있다.

H.B 헐버트는 ‘한국 사람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분’으로 칭송받는다. 그는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고, ‘웨스트민스터사원보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고 하여 1949년에 양화진에 잠들어 있다. 결핵 퇴치를 위해 애쓴 R.S 홀도 이곳에 잠들어 있다. 로제타 홀은 의료선교사로 남편과 딸을 먼저 잃는 고통 속에서도 45년 동안 한국을 사랑하였고, 결핵 환자들을 치료하였고, 그들을 위해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하여 결핵에 대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51년 세상을 떠난 그녀는 양화진에 3대에 걸친 6명의 가족들이 합장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이곳에는 6.25전쟁에 참전했던 미군과 그의 가족과 군목 등 총 126기의 묘도 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북한의 김일성과 소련의 스탈린, 중공의 모택동 공산세력이 일으킨 6.25전쟁에서 미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 틀림없다. 역사의 교훈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의지와 함께 보은(報恩)이 이심전심으로 전달되길 바란다.

이억주 목사 (한국교회언론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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