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敬虔)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소중히 받들고자 하는 마음이다. “경건을 연습하면 범사에 유익하며 금생과 내생에 약속”(딤전4:7~8)이라고 하신다. 경건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예배와 기도, 복음 전파, 주의 일에 힘쓰며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다.
바리새인들은 위선자였다.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했다. 위선은 나의 전형적인 특징이 아니겠는가? 누구나 가면(假面)을 쓰고 산다. 다 위선자이다. 선한 척, 겉모습은 깨끗한 척 하지만 속은 더럽고 썩어 있다. 이것이 위선의 본질이다. “너희가 박하와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위선적인 신앙의 특징은 항상 외적(外的)이다. 겉치레와 겉모양만 그럴 듯하게 꾸민다.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하지만 그릇 속은 그렇지 못하다. 거짓 경건은 제도(制度) 중심주의이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성전에서 예배했다. 성전은 이들의 전부였다. 성전을 숭배했다. 이것이 그들의 큰 문제점이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제도화하고 싶어 한다. 조직에 속할 때 만족해한다. 교회를 제도화할 때 만족을 느낀다. 유대인들은 모든 것을 예루살렘 성전에서 찾으려 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하나님은 이 산(그리심 산, 863m)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장소에 제한시켜 놓고 특정의 장소를 거룩하다고 옹호했다. 그것을 제도화했다. 때문에 성전이 무너지는 것은 곧 예배가 끝장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대성당 안에서는 예절, 질서, 위엄, 예배에 그토록 신경을 쓰지만 일반 장소에서는 딴판으로 행동한다. 거짓 경건이다. 경건은 하나님 말씀에 온전하게 철저히 승복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배의 출발점이다. 고라와 나단과 아비람은 이스라엘의 족장으로서 능력이 출중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의 지도와 명령을 거부했다. 하나님이 모세와 아론을 택하시고 모세에게 계시를 주셨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밤에 찾아 온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이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경건의 모습은 거듭난 영혼이다. 정직하고 순전한 마음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뜻과 온 마음을 요구하신다. 욕심과 정욕이 들어가면 안 된다. 참된 경건은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참된 경건은 진리 그 자체와 연결된다.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통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야 한다.
꽃 속에서 일하는 꿀벌은 그 꽃 속에 있는 매우 쓴 즙을 빨아 들여 꿀로 만든다. 벌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경건한 사람의 삶은 쓴 것들을 달콤하게 바꾸어 놓는다. 경건의 능력이 하는 것이다. 경건은 참된 영적 당분(糖分)이다. 겨울에는 따뜻한 불과 같고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과 같다. 사랑이 식물이라면 경건은 그 꽃이다. 사랑이 보석이라면 경건은 그 광채이다. 사랑이 향유라면 경건은 아름다운 냄새다.
경건은 우리를 위로하는 달콤한 냄새이다. 경건은 직업에 따라, 신분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나타난다. 꿀벌은 꽃에서 꿀을 빨아 먹을 때 절대로 꽃을 해치지 않는다. 경건한 사람은 주변 사람을 유익하게 한다. 가정에도 부부간의 사랑이 더욱 진실하다. 나라에 더 충성스러워진다. 모든 일자리가 즐겁고 유쾌하다. 진정한 경건이란 완전하고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삶’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고 경계해야 한다.
김용관 장로
<광주신안교회·한국수필문학가 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