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영화배우 신영균 장로(95·예능교회 원로)가 땅 4천 평을 이승만(1875~1965) 초대대통령기념관 건립 등으로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이 전대통령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분은 건국대통령일 뿐 아니라 6.25전쟁 때 우리나라를 지킨 분”이라 했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해방과 대한민국 정부수립 6.25전쟁 전후 폐허 속에서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일구며 선진국으로 발돋움해온 과정을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지켜본 노배우의 체험적 평가라는 점에서 감동이 각별하다.
“이승만이 없었으면 대한민국도 없다”는 말엔 3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이승만이 없었으면 해방 후 좌파의 집요한 파괴책동 속에서 1948년 정부수립이 어려웠을 것이라는 게 첫째이고, 그가 없었으면 1950년 김일성의 남침을 물리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게 둘째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그가 있었기에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승만은 미국이 군사고문단 3천 명만 남겨둔 채 1949년 미군을 철수한 탓에 전쟁이 났다고 봤다. 그래서 휴전협정에 앞서 방위조약협상을 미국에 집요하게 요구했다. 휴전협상이 한창이던 1953년 6월에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전망은 불투명했다. 당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대통령은 휴전협정부터 체결하자는 식이었고 미국무부 등도 “공산세력의 재남침시 참전국들과 강력한 응징보복을 한다”는 선언 정도로 때우려는 기류가 강했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한국을 지킬 수 없다고 본 이승만은 3만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충격요법까지 동원하며 배수진을 쳤다. 그 덕분에 7.27휴전협정을 체결 후 한미 외교장관이 협상을 시작해 10월 1일 양국정상이 서명했고 이듬해 11월 상호방위조약이 발휘됐다. 한미상호방위조약체결 70주년을 기념해 반기문재단과 고려대통일융합연구원이 심포지엄 때 주제발표자인 제성호 교수(충신교회 장로)에게 “휴전 후 한미방위조약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질문에 제 교수는 서슴지 않고 “1950년대에 공산화됐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미군이 철수하자 1973년 함락된 남베트남, 2021년 아프가니스탄처럼 한국도 공산치하에 들어갔을 거란 얘기다.
휴전 이후 1971년 남북대화가 시작될 때까지 20년 가까이 북한의 무력도발은 7천800건이 넘고 안보불안상황도 이어졌다. 이승만은 휴전협상 국면을 한미동맹 체결 모멘텀으로 활용, 6.25후 한국이 미국의 동맹국가로서 경제 군사지원을 받으며 한강의 기적으로 나갈 발판을 마련했다. 이승만은 당시 특별담화를 통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우리나라 독립역사상 가장 귀중한 진전이고 그 영향이 자손만대에 미칠 것이니 우리가 잘만해서 합심협력으로 진전시키면 후대에 영원한 복리를 줄 토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대로 실현됐다.
7월 27일 백선엽 장군의 다부동 전적지에 이승만 동상이 제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