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호는 가슴 속이 철렁했다. 바쁘게 손은 움직이면서도 마음은 자꾸만 여동생인 미순엄마에게서 맴돌고 있었다.
“미순엄마가 쓰러졌대요.” 아내의 모기소리만한 목소리의 전화를 받는 순간 기어코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아찔한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10년쯤 전 교편을 잡고 있던 미순엄마가 아침 출근길에 혈압으로 쓰러졌던 일이 있은 후로는 언제나 가슴 속 밑바닥에 앙금처럼 염려가 도사리고 있어왔기 때문이다. 흔히 두 번째 쓰러지면 깨어난다 해도 몹시 위험하다는 말을 들어오고 있는 터라 놀라움과 아픔은 처음 때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순호는 부랴부랴 대충 일을 정리하고는 정신없이 사무실을 나섰다. 이 넓고 넓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 어렸을 때 아무데나 따라다니려고 떼를 쓰는 바람에 구박도 많이 받았던 미순엄마였는데. 그러나 그 구박은 오히려 어머니의 화만 불러 일으켜 야단만 실컷 맞게 하던 여동생이었다. 그래서 미움을 갑절이나 받던 미순엄마였다. 그랬던 여동생이 지금 또다시 혈압으로 쓰러졌다는 게 아닌가!
‘야! 너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큰오빠가 이렇게 있는데 나보다 먼저 가려고 하다니? 나보다 먼저 가면 안돼!’ 순호는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지하철의 계단입구가 어른거렸다. 홍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슬픔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어디 가는 표요?” 표 파는 역무원의 짜증어린 목소리가 연거푸 튀어 나왔을 때 그제서야 순호는 머리를 치켜들었다. “네? 아 네네 당산역이요.” “돈을 내셔야지요!” 정말로 화가 난 음성이었다. “네 네 여기요.” 순호는 허겁지겁 돈을 꺼내 창구 안으로 디밀었다. 뒷사람들의 불평소리가 들렸다.
‘야! 이 사람들아 지금 내 형편이 어떤 줄이나 알아? 단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 혈압으로 또 쓰러졌단 말이야. 뭘 좀 늦었기로서니 왜 그러는 거야 도대체!’ 한바탕 퍼대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그럴 겨를이 없는 것이다.
“너 나보다 먼저 가면 안 돼! 차례가 그렇게 뒤바뀌어서야 되냐?‘”순호는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내뱉었다. 그러자 비좁게 서 있던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똑같이 자리를 비켜섰다. 머리가 돈 사람으로 보고 있는 게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설사 그렇게 본다 하더라도 그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싶어 아예 무시해 버리고 말았다.
죽음이라는 것! 어느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절대적인 것.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좀 잘해 주었을 것을.’
지난해 교회에서 권사투표에 낙선되고는 남편 장로에게 면목이 없다던 여동생. 몸이 성하지 않으니까 교인들이 생각해서 뽑아주지 않았던 게 아니냐고 일렀지만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던 여동생이었다.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은 효자 외아들이 있다.
‘기운을 내라. 너 같은 착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저버리실 리가 있겠니? 혈압이란 모세혈관이 터져서 뇌출혈이 되어 쓰러지는 것인데 걱정할 것 없어.’
어느 새 내려 깔린 어둠 속에 유난히도 빨간 십자가가 산뜻해 보였다.
‘지금 여기 큰오빠가 부지런히 달려가고 있다. 마음을 단단히 가져야해. 알겠지 미순엄마야! 하나님! 이 세상에 우리 매부나 여동생처럼 착한 사람이 드물지 않습니까. 하나님! 이 땅에서 천 년 만 년 살 수 없는 목숨임을 어이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저보다는 먼저 가면 안되지 않습니까. 하나님!’
순호는 눈앞에 뿌연 안개가 끼이듯 다시금 희미해져 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원익환 장로
<남가좌교회 은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