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물이야기] 축복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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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우리나라의 경제 사정은 매우 어려웠다. 밥 세끼를 다 먹지 못하는 가정이 많았다. 우리 집은 그 당시 다른 집들보다 더 가난했다. 나의 어머니는 어려운 살림에 일곱 자녀를 키우느라 여간 고생을 하신 것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해 보면 늘 배고픔에 시달렸다. 유일한 낙이 길거리에 쇠붙이를 주워다 엿을 바꿔먹는 일이었다. 

식사 시간에는 온 식구가 양푼에 꽁보리밥을 함께 퍼먹곤 했다. 반찬이라곤 김장 무를 젓가락에 꽂아 조금씩 뜯어 먹은 것이 전부였다. 그 당시 모두들 참 가난했다. 매일 아침 어려운 우리 가정에도 어김없이 밥을 구걸하는 걸인들이 찾아오곤 할 정도였다. 어린 시절 온통 내 마음은 먹고 싶은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도 어머니는 10리 길 되는 산간 마을에 늘 복음을 전하러 다니셨다. 어린 시절에 종종 어머니를 따라 함께 예배를 드리곤 했다. 겨울밤에 10리 길은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칠흑 같은 어둠과 살을 도려내는 듯한 바람은 고통 그 자체였다. 어머니는 예배를 인도하러 이 길을 밤마다 다니셨다. 

종종 머리 위에 떡 광주리를 이고 가서 가난한 마을 사람들을 먹이시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의 행동에 대해 늘 불만이 많았다. 우리도 못 먹는 떡을 마을 사람들에게 갖다 주는 것이 너무 속이 상했다. 나이가 들어 생각해 보니 어머니는 참 믿음의 사람이었다. 선행을 삶으로 늘 실천하고 사셨다. 

몇 년 전에 울산에 있는 큰 교회로부터 집회 초청을 받았다. 그 교회 목사님과 사모님은 어머니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분이었다. 당시 신학생이었던 목사님은 어머니가 마을에 복음을 전하러 다니실 때 종종 함께 가서 말씀을 전했다. 그리고 사모님은 어머니가 마을에서 전도했던 처녀 성도였는데 두 분이 어머니 덕분에 만나 결혼을 하셨다. 어떻게 나와 연결이 되어 집회에 초청해 주셨다. 그때 사모님이 어머니에 대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해주셨다. 

사모님이 청년 때에 어머니께서 마을의 청년들을 주일날 본 교회로 인도하고 예배를 마치면 꼭 집으로 데려가서 푸짐히 점심을 먹여서 보냈다고 했다. 점심을 먹을 때 우리 형제들이 가까이 오면 멀리 쫓아내셨다고 했다. 그 당시에 먹을 것이 충분하지 않아 혹시라도 청년들의 음식이 부족할까 봐 식사가 끝날 때까지 못 오게 하셨다고 했다. 

이제 목회자가 되어 어머니의 삶을 되돌아보니, 어머니야말로 내가 가장 본받아야 할 신앙의 모델이셨다. 오늘 내가 누리는 이 큰 복은 어머니가 심어 두신 선행의 열매임이 분명하다. 

오늘 많은 부모들은 내 자녀들을 이 땅에서 안락하게 살게 해주려고 아낌없이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일류 대학에 보내기 위해 아끼고 절약하며 엄청난 돈을 교육비에 투자한다. 신앙을 가진 부모조차도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성경은 어디에도 복이 세상의 것으로부터 온다고 말하지 않는다. 자녀에게 오는 복은 부모가 뿌린 선행의 씨앗에서 싹튼다. 내 자녀가 진정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하면 선행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 

이은태 목사

 뉴질랜드 선교센터 이사장

 Auckland International Church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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