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를 듣거나 설교를 들을 때 최소한 몇 개의 핵심 메시지와 메모지를 꺼내서 적거나 마음 속으로 암송하고 싶은 명구(名句)들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기다려도 일상적인 아무것도 아닌 말들만 계속되면, 기대가 변해 실망이 되고 점점 지루함을 느끼면서 30분 내의 설교(강의)시간이 아까워 자꾸 시계를 쳐다보게 된다. 이것은 시간이 아깝다. 얼른 끝내기라도 해달라는 무언의 신호이다. 강사나 설교자는 청취자가 고개를 계속 숙이거나 딴 곳을 바라보면 그 의미를 얼른 알아차려야 한다. 최소한도의 서비스는 무익한 말(강의나 설교)을 빨리 끝내주기라도 해야 되는 것이다. 강의나 설교 안에 기억하고 싶은 말이 될만한 언급을 몇 개 소개해본다. ① 진리의 세계에서 진짜와 가짜의 구별은 쉽다. 가짜는 언제나 돈을 요구하고, 진짜는 언제나 공짜이다. 값을 따질 수 없어 공짜고, 지불할 능력이 없어 공짜다. 진리는 거저주고 거저받는 것이다. ② 비본질은 본질의 그림자다. 그림자는 아무리 좇고 아무리 붙잡아도 허상이다. 허상은 결코 생명이 아니다. ③ 신(God)이 있다거니, 없다거니 논쟁할 일이 아니다. 있으면 누리며 살고, 없으면 침묵하면 된다. 누리지도 못하면서 있다고 주장하면 무슨 소용이며, 없이 살면서 있다고 목청을 높이면 뭐하겠는가? ④ 빛이 짙으면 그늘도 짙다. 어둠이 짙어 빛은 더욱 빛난다. ⑤ 걸핏하면 스스로 과대평가하거나 아니면, 과소평가하는 두 갈래 엇나간 길에서 진리는 우리 자신을 돌이키는 유일한 기준이다. ⑥ 무엇에 목마른가? 탄산음료는 마실수록 목이 더 마르다. 술도 갈증을 더한다. 생수(生水)만이 목마름을 해갈한다. 가짜는 더 목마르게 한다. 가짜는 더 허기지게 한다. 그래서 진짜를 찾아야 한다. 진짜가 진리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요 8:32). ⑦ 진실은 주장하지 않는다. 주장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진실은 그래서 늘 상반되는 주장들 사이의 어딘가에 조용히 있다.(순금은 ‘금’이라고 주장하고 선전할 필요가 없다. 그 자체가 금이기 때문에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 ⑧ 사랑없는 정의는 폭력의 다른 얼굴이다. 한 사람은 살고, 한 사람은 죽어야 한다면 반쪽 정의다. 둘 다 살아야 온전한 정의다(지금 ‘국민의 힘’과 ‘더불어민주당’의 당원들과 국회의원들이 깊이 생각하면 좋겠다고 생각된다. 그래야만 ‘내로남불’이란 비속어가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무슨 짓을 해도 정의고, 상대는 어떤 일을 해도 불의라고 생각하면 상대도 죽이고 자신도 죽는 길이다. 어항 속에서 두 마리의 물고기가 싸우다 한 마리가 죽고 나면 잠시 후, 그 고기의 시체가 썩고 어항 물이 오염돼 남은 고기도 죽게 된다). 온전한 사랑은 ‘제로섬’이 아니라 ‘윈-윈(win-win)’이 되어야 한다. ⑨ 진짜보고 진짜라면 부끄러워 하고, 진짜보고 가짜라면 웃고 말지만, 가짜보고 진짜라면 반색을 하고, 가짜보고 가짜라면 화를 낸다. 우리 주변의 사례들을 이 네 가지 범주로 분류해보자. ⑩ 아무리 십자가를 목에 걸고, 십자성호를 그리며 기도하고, 십자가를 높이 세워도 나를 고집하는 십자가는 예수님과 상관없다. ⑪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있어도 버려진 사람은 없다. 세상이 뭐라고 해도 내가 나를 버리지 않는 한 나는 버려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결단코 버릴 사람을 이 땅에 보내지 않았는데 왜 내가 나를 버리겠는가? ⑫ 종교인은 성소(성당/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끝이고, 신앙인은 삶의 자리에서 예배를 이어간다. 그래서 종교인은 성소를 거룩하게 하고, 신앙인은 삶의 현장을 거룩하게 한다. 오늘날, 기독교의 문제는 성소(교회)와 삶의 현장(가정, 직장, 사회)이 분리되어 각돌고 있기 때문이다. 이중적 기준을 갖고 살기에 교회 안에서 보면 신앙인 같고, 사회에서 보면 종교인 같다. 이것을 가리켜 ‘56도 신자’라고도 한다. 부산 앞바다에는 5개도 되고 6개도 되는 섬이 있다. 종교는 성지를 만들고, 신앙은 성지를 버린다. 영원은 성지에 갇히지 않기 때문이다.
김형태 박사
<한남대 14-15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