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고아들의 벗, 사랑과 청빈의 성직자 황광은  목사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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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보이스 타운 < 3> 

이 행복을 아이들에게 주자 ②

예수님 닮고자 일관된 삶 추구

결혼 생활, 삼동 소년시에 바쳐

입덧으로 영양실조 아기 낳아

황 목사 내외, 자기희생·남모를 눈물

내가 한국보육원에서 황 목사님을 만났을 때 그는 30대 전후였으나, 그 젊은 나이에 70세, 아니 80세를 살아도 도달할 수 없는 고고하고 위대한 경지에 이미 도달해 계신 분이셨다. 그는 철저히 예수님을 닮는 삶으로 일관한 분이셨다.

교육이 땅에 떨어지고 청소년 문제가 시끄럽고 사회사업가라는 일부 사람들의 비리가 보도되며, 목회자상이 땅에 떨어졌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황 목사님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그 분이 지금까지 살아 계셨더라면 우리 사회가, 특히 기독교계가 이렇게 혼탁하게 되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도 어느 새 노년이 되었다. 젊은 날의 아름다웠던 추억을 더듬게 될 때면 하모니카를 꺼내들고 한국보육원에서 배운 동요를 불러본다. 그럴 때면 많은 얼굴들이 떠오른다. 그 중에서도 황 목사님과 나의 친구 유선 씨의 얼굴이 가장 크게 떠오른다.

난지도에서의 신혼 생활

난지도 시대 – 그것은 황광은 형의 전성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귀빈들이 줄지어 찾아왔고, 매스컴이 남에게 뒤질세라 떠들어댔고… 그러나 그 영광의 뒤에는 말 못할 자기희생이 있었다. 원래 자기희생 없이 사회봉사란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황광은 형과 그의 아내 김유선 여사 – 그들 내외는 결혼생활을 난지도에서 시작하면서 자기네가 지닌 모든 것을 난지도 삼동 소년시에 바쳤다.

그들 내외는 신혼살림을 차리고서도 식사 시간에나마 함께 마주앉아 밥을 먹은 일이 거의 없었다. 광은 형은 아이들 방에 가서 함께 식사했고, 김 여사는 일하는 아줌마와 함께 식사했다. 누가 시킨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통솔도 통솔이려니와 그렇듯 이상적인 마을을 세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잠자는 시간 역시 마찬가지였다. 광은 형은 신혼 아내를 혼자 버려두고, 아이들 방을 차례로 돌아가면서 잤다. 그러나 어쩌다 오래간만에 두 사람만의 단란한 밤이 되면, 광은 형은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런 행복스러운 밤을 아이들에게 선사했으면 좋겠어.”

그러니 김유선 여사로서는 적적한 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광은 형에게 라디오를 하나 사는 것이 어떻겠느냐 했더니,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불행한 아이들 방에 라디오를 다 놓게 된 후에 우리가 삽시다. 우리는 행복하지 않소? 우리 방에서만 음악소리가 흐른다면 뭐 좋겠수?”

이런 상황이니 그들 내외가 영양을 제대로 섭취할 리 없었다. 광은 형이야 먹지 못해서 죽으면 된다지만 임신 중인 김유선 여사의 경우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를 김 여사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난지도에서 살 때 둘째 딸 은숙이를 낳았다. 입덧이 하도 심해 통 식사를 못했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 그래서 건빵을 사다 두고 배고플 때마다 몇 개씩 먹고 연명을 했다. 아기를 낳아놓고 보니 뼈에 가죽이 시들시들 말라 비틀어졌고, 입만 커다란, 정말 볼품이 하나도 없는 영양실조가 된 아기를 낳았다. 친척들이 와서 그 아이를 보고는 눈물이 글썽글썽해졌다.”

그런 상황이었음에도 김 여사는 광은 형을 이해하지 못하기는 커녕 본인 자신이 보람찬 일로 알고 힘에 겨울 정도로 일에 열중했다. 그래서인지 김 여사는 그 당시 그의 일생중 가장 인상 깊은 꿈을 꾼 것이다. 한번은 비둘기가 하늘에 훨훨 날고 있는 꿈을 꾸었고, 또 한 번은 예수님의 얼굴을 똑똑히 바라다본 꿈을 꾼 것이다.

김유선 여사가 겪어야 했던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손님 치다꺼리였다. 윤락여성단체인 YMCA의 삼동 부녀회원과 가난한 어린이들을 교육하는 학생들이 수시로 방문하곤 했다.

그들은 아무 예고 없이 수십 명이 들이닥쳐 밥을 먹곤 했기 때문에 삼동 소년시의 생활 계획이 무너져 버리곤 하는 것이 예사였다.

그 당시 김 여사는 삼동 소년시 전체 주민 200여 명의 식사 메뉴, 의복 배당, 그리고 아픈 아이들의 치료를 맡고 있었는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이런 방문객들로 말미암아 식량이 끊어져 버리고 마는 일이었다.

식량이 있을 때에도 이와 같이 예정에 없던 방문객들 때문에 식사 준비에 차질이 생기곤 했다. 200명에 이르는 소년시 시민들의 끼니 준비를 하자면 아침식사 후 곧 점심식사 준비를 해야 하고, 점심이 끝나면 또 곧 저녁식사 준비를 해야만 했다. 그런 바쁜 상황인데 아무 예고없이 YMCA에서 삼동 부녀회원이나 학생 등 70~80명이 들이닥치면 점심식사 준비를 두 번 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날에는 삼동시 주민들의 저녁식사 시간을 제대로 맞출 수 없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김 여사는 YMCA에서 방문객 관계 연락을 담당한 젊은 간사에게 부탁했다. 방문객들이 성의로 찾아주는 것은 좋지만 어느 날 몇 시에 몇 명이 오는지 미리 통지해 달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뜻이 잘못 전달되어 미세스 황은 손님이 찾아가는 것을 귀찮게 여긴다고 소문이 났고 그 소문을 말없이 듣고 참아야만 하기도 했었다.

뿐만 아니라 여름이면 교회 학생 단체들이 여름 수양회를 하기 위해 난지도에 몰려들곤 했다. 그럴 때면 김 여사는 또 눈에 보이지 않는 뒤치다꺼리로 숨은 고생을 해야만 했다.

한국의 보이스타운 삼동 소년시! 세월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 들어도 멋진 것이요 감격스러운 이름이다. 그러나 그것을 이룩하는 데는 뒤에 숨어서 자기희생을 하는 황광은 목사 내외의 남모르는 눈물이 있었다. 그리고 말 못할 고생이 있었다.

1998년 어느 날, 김유선 여사의 형부인 엄요섭 목사는 필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그때는 나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때였기 때문에 외국에 유학을 가지 않겠느냐 했더니, 김유선은 황광은 목사와 결혼해서 사회사업을 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황광은이 어떤 사람인가 하고 아는 사람에게 물어 보았더니, 그를 아는 사람은 한결같이 ‘성자와 같은 사람이요, 멋진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결혼을 허락하게 되었고, 어느 여름에 사흘쯤 머물 생각으로 엄 목사는 아이들을 데리고 난지도로 찾아갔다. 그러나 보이스타운의 시민들과 꼭같이 먹고 자는 황광은 목사 내외의 생활상이 너무나 비참하게 느껴져 하루를 겨우 보내고 다시 돌아왔다고 했다.

김유선 여사 자신은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을 무척 꺼려 해 필자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낸 일이 있다. “사람들마다 공식처럼 저를 추켜세우는 칭찬의 말을 하곤 하는데, 저로서는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이 정말 송구하고 거북합니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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