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현대 교회의 위기를 Chritianity가 “Church-anity”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교회의 위기는 교회가 교회중심적이 될 때이다. 풀러신학교의 알렌 락스버러 교수는 Joining God, Remaking God, Changing the World 라는 책을 썼는데 IVP에서 <교회 너머의 교회>라는 이름으로 번역했다. 대개 번역서 제목이 원제목의 의도를 살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원제목보다 번역서 제목이 내용에 더 부합한 것 같다. 알란 락스버러 교수의 책에서 주목할 것은 ‘유럽의 종족들에서 기원한 교회들이 와해되고 있는 북미 교회들의 상황’은 거의 와해되고 있는 수준인데 그 와해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쁜 소식이라는 것이다. 이 견해에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고 반대의견을 표현하는 분들도 있지만 저는 이러한 시각을 깊이 공감한다. 하나님께서 손을 거두신 것이 아니며, 성령께서 이 과정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이 와해의 자리는 희망의 자리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령께서 앞서서 행하고 계신 것을 분별하면 이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기회이다. 약간 조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전면적인 변화를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문화에서 기성화된 교회를 근본적으로 흔드시는 것은 역사적으로 계속되어왔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로 지정되었을 때 교회는 정치 제도 안으로 들어오게 되어 기성화되었을 때 사막의 수도원 전통이 시작되었다. 5,6세기 유럽의 거대한 사회적 변화의 시기를 겪을 때 켈트 선교사 운동이 시작되었다. 지금 겪고 있는 대붕괴 수준의 교회의 침체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선교 운동을 일으키시는 기회로 보아야 한다. 교회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확신 아래 하나님께서 이러한 와해를 통해 하나님께서 교회를 새롭게 재편하시고 계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와해과정을 통해서 어떤 교회로 재편하기를 원하시는가? “교회 너머의 교회”이다. 교회 자체를 넘어서 교회의 존재 목적에 충실한 교회이다. 즉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데 충실한 것이다. 요즘 많이 회자되는 ‘선교적 교회’로 존재할 때이다. 그러면 어떻게 선교적 교회로 변화되고 존재할 수 있는가? 여러가지 설명이 가능하지만, 에베소서 2장의 표현대로 하면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풍성하신 긍휼과 은혜를 나타낼 때이다. ‘선교적’이란 에베소서의 시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은혜의 풍성함을 나타내며 알게 하는 것’이다. 교회는 스스로의 힘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과 은혜로 존재한다. 교회가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인해 존재한다면 또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구원론은 선교론과 결코 떨어질 수 없다. 구원의 본질은 반드시 선교적 삶으로 이끈다. 세상 끝까지 가서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않으면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날 수 없다. 선교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앉히신 풍성하신 긍휼과 은혜를 온 세상에 여러 세대에 나타내는 것이다. 교회가 선교적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그 본질을 상실한다. 또한 참으로 교회의 정체성을 가지지 않은 선교회도 하나님의 선교적 사명을 수행할 수 없다. 교회가 선교회가 되지 않고도 존속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교회의 본질에 어긋나는 것이고, 교회가 선교적 정체성을 회복하지 않고는 진정 교회다운 모습을 회복할 수 없다. 한국교회가 교회 너머의 교회가 되도록 함께 기도하자.
이재훈 목사
<온누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