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원의 아버지 즉 이정화 교수의 할아버지는 실생활에 무능력 한데 비해, 할머니(춘원의 어머니)는 길쌈을 하는 등 매우 성실하여 그 생계를 꾸려나갔다는 말을 아버지로부터 들었다고 했다.
한편 춘원의 시 중 몇 구절을 영역한 것을 소개하며 춘원과 사제지간이었던 시인 모윤숙 여사를 회고했다.
모윤숙 여사가 이정화 교수에게 ‘비록 3천만이 춘원을 미워해도 너는 아버지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라고 했던 말을 회고했다. 한편 그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미국 가족에게 춘원이 보냈던 2통의 편지를 예로 들었다. 그 내용은 서울에 구속중인 안창호 선생을 면회하고 나서, 도산의 가족이 도산을 면회하기 위해 한국에 오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그때의 도산 안창호 선생의 딸인 안수산 여사는 94세로서 미국에 살고 있으며 지난 날 서울 강남의 ‘도산공원’에서 ‘버드나무 그늘아래’라는 자서전의 출판기념회를 가졌었다. 이정화 교수는 아버지로부터 도덕적, 종교적, 예술적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거지를 보면 호주머니에서 가장 큰 돈을 꺼내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라고 회고하면서 춘원은 그의 작품 중 돌베개, 사랑, 원효대사를 가장 아꼈다고 말했다.
한편 광복이후 춘원의 작품이기도 하며 그가 베었던 ‘돌베개’에 대해 민족을 위하여 동지를 구하려고 한 일이 나중에 민족을 헤쳤다하여 비난과 배척을 받았다.
“이것은 내가 부족하고 덕이 없는 까닭이다. 나는 돌베개를 베고 나를 채찍질하여 내 몸을 닦겠다”라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었다고 회고했다.
친일의 문제가 이광수에게 있어서 항상 아킬레스가 되는 안타까운 현실을 생각하면서 이정화 교수 역시 이 문제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주 억울한 일은 아버지가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에게 잡혀 다녔고, 대한민국에서는 반민법으로 시달렸고, 북한은 반동이라고 잡아간 것입니다”라고 대조적으로 예리하게 지적했다.
사실 이 강연이 끝나고 나서 청중들의 질문이 줄을 이었다. 이정화 교수가 아버지 유품으로 무엇을 갖고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이정화 교수는 아버지 서명이 들어 있는 ‘성경과 염주’라고 했다.
청중들 속에서는 기독교 성도들이 “춘원이 언제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도 있었다. 또 어떤 사람은 기독교 시기의 춘원은 반일 독립운동을 전개했는데, 불교도로서의 춘원은 반민족적 친일을 하게 되었다고 힐난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그저 간단히 ‘업보(業報)이지요’라고 대답했다. 불교의 의미로 보아 불가피한 운명적이라는 뜻도 된다. 아주 짧지만 명쾌한 의미가 내포된 대답이었다. 춘원이 막내 딸 이정화에게 어렸을 적에 염주와 성경책을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려울 때는 성경을 읽고, 괴로울 때는 아버지 십팔번 찬송가를 불라고 했다는 점을 회상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위의 질문자에 대한 대답이 이미 명쾌해졌다. 즉 춘원은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도 불교 역시 배격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종교적인 사상가는 그 모두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종교는 인간을 사랑하고 고독하며 살기 어려운 인간의 구원에 최종적 목표를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강연이 끝나고 참석자들에 대한 소개가 있었다. “나는 춘원 선생의 6촌 동생이며 광릉 봉선사의 주지였고, 우리나라의 불교대장경을 한국어로 번역한 위대한 학승인 운허 이학수 스님이 세운 광동중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춘원은 사릉에서 머물다가 그러한 인연으로 이 광동중학교에 와서 한 학기동안 교사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지은 교가는 오늘까지도 이 학교에서 불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채수정
(본명 채학철 장로)
–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