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저일 생각하니] 연세대 명예졸업생이 된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

Google+ LinkedIn Katalk +

미국 리버사이드 시청앞에 도산 안창호(1978-1938) 선생 동상이 미국 흑인 킹 목사와 인도 간디와 함께 가운데 나란히 서 있다. 세계 평화주의자로 세계 시민사랑의 대표적 인물인 것이다. 전 전남대 박만규 역사학교수는 그의 저서 ‘도산 안창호’에서 대한민국 국부로 도산을 존경하고 있다. 

지금 애국가를 지은 작사자로도 남북 8천만 한글겨레의 존경을 받고 있다. 연세대 명예교수 고 김동길 교수는 안창호가 우리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면 남북통일이 벌써 되었을 것이라 말씀한바 있다. 교육입국을 부르짖은 도산은 점진학교(1899), 대성중학(1907), 흥사단(1913), 중국 남경 동명학원(1924) 등의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주권재민의 애국가를 지어 60한평생 조국광복을 위한 독립운동에 목숨을 다 바쳤다. 어려서는 한학공부를 했으나 1894년 16세에 상경하여 언더우드학당(경신고 전신) 입학 3년 과정에 기독교 장로교에 입문하고 언더우드가 1887년에 세운 새문안교회 독실한 성도가 되었다. 일제시대 대표적인 새문안교회 성도는 도산을 비롯하여 독립운동가 김규식 음악가 홍난파 한글학자 최현배로 손꼽힌다. 약혼된 13세의 이혜련을 동생 안순호와 함께 정신여학교 6년과정을 교육시켰다. 그리고 이혜련은 김마리아 외숙 김윤오 주선 밀러 목사 주례로 제중원(현세브란스)에서 결혼하고 다음날 부부동반 미국행 배에 올랐다. 배의 갑판에 올라 멀리 조국독립의 희망으로 느껴지는 산봉우리를 보고 당신의 아호를 도산(島山)으로 지었다. 1902년 10월 14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만나본 교포들이 무지했다. 교육학전공 유학을 접어두고 먼저 노동자가 되어 교포지도에 앞장서며 귤 하나를 따도 나라사랑의 마음으로 따라 했다. 1907년 일제의 을사늑약, 정미7조약 등으로 조국의 위기를 느껴 구국일념으로 1907년 2월 22일 제물포항으로 귀국했다. 

즉시 이갑, 전덕기 상동교회 목사 등과 애국비밀단체 신민회를 조직 지도하며 교육, 산업, 경제, 문화, 언론 등으로 나라사랑 활동을 펼치다가 1912년 일제의 105인사건으로 신민회 활동이 중단되었다. 거국가를 남기고 미국에 건너와 대한인국민회 조직 신한민보 발행 등 지도적 활동을 열렬히 하다가 1919년 3.1운동을 맞이하여 곧 상해에 세워진 임시정부 초대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를 맡아 임시정부 기초 살림을 튼튼히 했다. 대공주의 사상으로 임시정부 갈등 해소에도 최선을 다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홍구공원(현 노신공원) 일장절 행사 현장에 도시락 폭탄을 던진 통쾌한 사건 배후 조종자로 일경에 체포 되어 서울로 압송 4년 언도를 받고 서대문, 대전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 2년 반만에 가석방 되었다. 평양 송태산장 요양중에 흥사단 동우회 사건으로 1937년 다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되었다. 

일제 고문 후유증으로 경성제대(현 서울대) 병원에서 60세로 순국했다. 학생이나 동포에게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나라를 사랑하거든 그대가 먼저 건전한 인격이 돼라”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등 금싸라기 같은 말씀을 많이 남겼다.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독립운동만 하겠다고 일제 검사에게 말한 순국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이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운 연세대학교 자랑스런 명예졸업생이 되었다. 1913년 11월 8일 연세대 장기원기념관 강당에서 정갑영 총장은 도산 외손자 커디에게 연세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 

언더우드학당 3년 대학부 교육과정이 높이 평가 되어 탄생 135년 서거 75년만에 영광의 연세인 동문이 되었다. 연세인 모두 안창호 동문의 60한평생 독립운동에 목숨 바쳐 순국한 애국애족정신을 잘 본받아야 할 것이다. 온 국민도 도산이 지은 애국가를 4절까지 다 부르며 남북통일 염원하며 도산정신으로 국민도리를 다해야 할 것이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