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긴과 보아스] 어른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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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와 교계의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어른’이 안 보인다는 겁니다. 아니 어른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자기하고픈 대로 합니다. 집요하면서도 목청 큰 사람이 주도해 가는 형편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의 혼돈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사사 시대의 마지막 모습,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21:25) 처럼 모두들 제멋대로입니다. 질서와 배려, 품격이 사라졌습니다. 막무가내식으로 고집부리고 밀어붙이는 사람들뿐입니다. 

왜 어른이 사라졌을까요? 배움은 옛날보다 더 많이 배우고, 건강은 예전 세월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이고, 의학과 삶의 환경 발전으로 더 오래 사는 편인데 왜 어른이 사라졌을까요? 엉뚱한 생각을 해 봅니다. ‘나이는 단순한 숫자에 불과하다’는 그럴듯한 말에 혹해서 그럴 겁니다. 그래서 모두들 나이를 경시하고 젊은이 행세만 하려 합니다. 그걸 따라갑니다. ‘점잖다’라는 말을 아시죠? 젊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모두가 젊어지려고만 하니 점잖은 사람들이 사라진 겁니다. 점잖다는 말 듣고 싶지 않습니다. 도태당하는 것 같아서 싫습니다.

늙는 것, 나이가 드는 것은 언제부터인지 우리 사회에서는 안 좋은 이미지로 굳어져 가고 있습니다. 젊은 것이 좋은 것이고, 늙는 것은 안 좋은 것으로 여기고 있으니 나이든 어른들이 자연스레 사라지고 있는 겁니다. 다들 그런 소리 듣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쩌다 훈계라도 할라치면 대뜸 꼰대질한다고 하니 더욱더 입을 다물게 되고, 뒤에서뿐만 아니라 면전에서 종알대는 그 젊은이들의 시선이 싫은 겁니다. 그래서 급기야 전철이나 버스 안에서 경로석을 외면하고 일반석에서 서서 가기도 합니다.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란 시가 있습니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 저 안에 태풍 몇 개 / 저 안에 천둥 몇 개 / 저 안에 벼락 몇 개 /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 있어서 /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대추 한 알에도 이렇게 세상이 녹아 있거늘, 인간의 나이가 어찌 단순한 숫자에 불과하겠습니까? 수많은 삶, 세월이 녹아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명하셨습니다.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32)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장로(長老), 그 말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우리 사회는 존경받는 장로를 찾고 그 존경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진정한 어른,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에 흔들리지 않는 큰 바위같은 어른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철없는 사회가 자리 잡아 갈 겁니다. 사회의 장로, 교계의 장로, 주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그런 어른들을 찾고, 당신들도 스스로 자존감을 회복한다면 사회도 교회도 훨씬 더 나은 공동체가 될 겁니다.

양의섭 목사

<왕십리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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