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들의 생활신앙] 자기 묘비명을 써놓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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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패보다 비석이 중요하다. 문패는 본인이 만들어 붙이지만, 비석은 다른 사람이 만들어 세우기 때문이다. 옛날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기며, 살구는 씨를 남긴다고 했다.(虎死留皮, 人死留名/王彦章傳). 사람은 남길 수 있는 게 여러 가지 있다. 자식을 남기고, 자기가 지은 책이나 강연, 설교나 법문을 남길 수 있고, 공직을 맡은 자는 업적과 공적을 남길 수도 있다. 그리고 함께 산 사람들의 기억 속에도 흔적을 남길 수 있다. 한 인간의 삶을 정리하면서 유언이나 묘비명도 남길 수 있는 한 수단이다.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나의 모습보다 내가 알고 있는 나의 모습이 좀 더 정확하다. 그러나 하나님(神)이 알고 있는 나의 모습이 가장 정확하다. 사람들은 호인이라고 생각했는데 본인이 볼 땐 반은 호인, 반은 악인일 수 있다. 하나님이 볼 때엔 매우 악한 사람일 수도 있다. 여하튼 일생동안 살아온 삶의 궤적과 쓴 글, 한 말, 관계한 모든 것들이 선한 것이기를 희망하고 기대한다. 몇 명의 묘비명을 알아보기로 하자. “나는 어머님의 심부름으로 이 세상에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 조병화 시인은 시 <꿈의 귀향>을 발표하면서 이 시를 자신의 ‘묘비명’으로 하겠다고 말했다. 2003년 시인이 세상을 떠나자 조병화 문학관에 이 묘비명시비가 세워졌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자신을 책에 비유해 “낡은 책의 표지가 닳고 문자와 금박이 벗겨져 나간 것처럼 그의 몸은 여기 누워 벌레에게 먹히고 있다. 그가 믿는 바와 같이 저자(하나님)에 의해 개정판이 나올 것이다”란 묘비명을 남겼다. 시인 키츠는 “여기 물로 이름을 쓴 사람이 누워 있노라”는 묘비명을 남겼다. 윈스턴 처칠은 “나는 창조주께 돌아갈 준비가 돼 있다. 창조주께서 날 만나는 고역을 치를 준비가 됐는지는 내 알 바 아니다”라는 익살스런 묘비명을 남겼고, 헤밍웨이는 “일어나지 못해서 미안하네”란 묘비명을 미리 써놨다. 평생 처녀로 산 어느 우체국장은 “반송(返送) – 개봉하지 않았음”이란 묘비명을 남겼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에 썼던 묘지명(墓誌銘)들도 전해오고 있다. 그중 몇 개를 골라보았다. ①사도세자(1735-1762)의 묘지명 “끝내는 만고에 없던 사변에 이르고 백발이 성성한 아비로 하여금 만고에 없던 짓을 저지르게 하였단 말인가? 어찌 내가 좋아서 했겠는가? (중략) 진실로 아무일이 없기를 바랐으나 9일째 이르러 네가 죽었다는 비보를 들었노라. 너는 무슨 마음으로 칠십의 아비로 하여금 이런 경우를 당하게 하는고”(영조 38년(1762)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은 뒤 영조가 직접 지은 묘지명). ②상고당(尙古堂) 김광수(1699-1770)의 묘비명 “더러 밥도 못 짓고 방은 네 벽만 휑했으나/ 금석이나 서책으로 아침저녁을 삼아서/ 기이한 골동이 닿기만 하면 주머니 쏟으니/ 벗들은 손가락질하고 양친과 식구는 꾸짖었다”(조선 최대의 서화 골동 수집가 김광수가 생전에 스스로 지은 묘지명). ③성균관 유생 윤유(1691-1712)의 묘지명 “병조참판 윤취상의 막내아들인 윤유가 1712년 생원에 합격했으나 성균관 유생이던 7월 9일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 당시 임신 중이던 부인 경주 이씨가 몸을 돌보지 않고 남편의 상을 치르다가 몇 달 뒤 병으로 유산을 하자, 양잿물을 마시고 자결하여 열녀로 칭송받았다.”(조선 숙종 46년(1719년) 윤유의 묘지명). 쿤데라는 묘지명을 가리켜 “존재와 망각의 환승역”이라 했다. 묘 속에 넣은 묘지명이나 묘 앞에 세운 묘비명이나 모두 한 인간의 생애기록이란 점에서 비슷하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았던 기념으로 어떤 묘비명을 남길 것인가? 살았을 때 한 번 써보자.

김형태 박사

<한남대 14-15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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