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생명의 길을 따라온 걸음 정봉덕 장로 (19) 하나님이 부르신 곳에서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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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원 수탁, 대통령상 수상 등 지역 사회 발전에 이바지

유 목사는 당면 과제였던 농촌출신 학생들을 위한 학사 건립과 순교자 유가족 후원, 월남한 노령 목회자 구제 등을 제안했다. 이에 안두화 목사, 감의도(Edward Otto Decamp) 선교사, 페트리트 미첼(Petrit Mitchell) 선교사, 유호준 목사, 안광국 목사, 김상권 목사, 김윤찬 목사가 구호위원으로 선임되어 구호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1954년 9월 17일 당국의 허가로 자선사업제단이 출발하여 미국 북장로교회의 보조로 순교자 유가족을 위한 순혜원, 은퇴 무임목사 가정을 위한 안양원로원, 농촌출신 학생들을 위한 칼빈 학사와 바울 학사를 매입하고 의욕적으로 운영하였다. 그러나 미국 북장로교회의 보조금이 감소되고 또 안양원로원을 잘 활용하지 못하여 1975년에 당국으로부터 수차례 정상운영에 대한 독촉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8년 4월부터 총회사회부 총무였던 내가 곽재기 목사(농촌부 총무)를 이어 2대 사무국장을 겸임하게 되었다. 당시 유호준 목사가 제3대 이사장으로서 휴면복지재단을 깨부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나는 표재환 장로(총회교육부 간사)의 추천으로 기독공보 전무이사로 재직할 때부터 감사로 봉사했기 때문에 정관개정과 목적사업을 조정하여 당국의 승인을 받아야 재산대체 인가도 가능하고, 또 휴면재단의 오명을 벗고 정상운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숙지하고 있었다. 바울 학사와 칼빈 학사에 불법으로 입주해 있는 이들을 내보내고 안양사 호계리 일대 재산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직원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1980년에 김응호 집사를 사무장으로 기용하면서 재단사무실을 개설하고 김응호 사무장에게 실무를 맡겼다.

1981년 2월 19일 목적사업으로 양로, 탁아, 모자보호, 수익사업으로 정관을 개정하여 당국에 복지재단 인가를 받고 5월에 재산대체 인가를 받아 1981년 2월에 재산 대체를 마쳤다. 그리고 안양시 호계리 915번지 3호 1천127평의 대지에 8만9천971평(약 100명 수용 규모)을 설계하여 발주하고 1982년 11월 11일에 준공하여 입주자를 받아 새롭게 운영을 하였다. 같은 해 11월에 준공하여 입주자를 받아 새롭게 운영을 하였다. 같은 해 11월에는 서울시로부터 노원 새마을 유아원을 수탁받아 사랑이 담긴 양육을 계속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등 지역 사회 발전에 이바지했다. 또한 반피득 선교사의 부인 반애란(Eleanor C.Van Lierop) 선생이 운영하던 은혜원(미혼모시설)을 1982년 자선사업재단이 기증받아 ‘애란원’으로 개명하고 12월 23일 당국으로부터 허가를 받아 신축하여 발전적으로 운영했다. 1984년 1월에 경기도로부터 경기기술학교 운영을 수탁받아 윤락여성의 자활을 돕기 위해 기술 훈련을 실시하던 중 화재사고가 발생하여 1995년 10월에 수탁 운영을 반환하게 되었다.

1992년 서울영락교회 홍복섭 권사가 공주시 근홍리 소재 대지 5천여 평을 기증하여 안양원로원을 이전하여 홍복섭 기념관으로 신축하여 운영하던 중 아담스 하우스를 무리하게 진행하여 부채를 갚지 못하는 일이 일어났다. 결국 2013년 총회의 허락으로 오정호 장로에게 공주원로원 운영을 이양하는 것으로 파산은 형식적으로 막을 수 있었으나 언제 어떻게 다시 돌려받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막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계약서에 의하면 50년 안에 갚아준 채무를 돌려주면 운영권을 돌려받도록 하였으나 앞으로 나라의 법이 어떻게 개정될지 모르고, 또 이와 관계된 분들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원로원 운영이 변하게 될 수도 있으니 걱정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단과 총회는 아직도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다. 총회와 전국교회 중 누구라도 이 문제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기도함으로 모금이 시작된다면 기꺼이 동참할 것을 다짐하며, 빨리 대책이 강구되기를 바란다.

나눔의 선교 시작한  한아봉사회

교권 중심지에서 살아오다 보니 기독교의 앞면과 이면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을 보게 되었고, 그것은 때로 내게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 자신과 내가 하는 일을 살피며 그 사이를 조율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6.25 전쟁 후 외국으로부터 받는 구호물자, 복지시설 보조금, 개척 전도비, 여러 명목으로 받는 선교비, 장학금 그리고 1970년대 이후 유럽교회에서 에큐메니칼 선교비로 받은 각종 지원금 등은 오늘의 한국교회가 이만큼 발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러한 도움과 하나님의 은혜로 세계선교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의 놀라운 성장을 이룩한 한국교회는, 나눔의 선교에 큰 관심을 갖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받은 은혜에 보답할 생각은 하지 않고 여전히 세상을 향해 회개하라며 호통을 쳤다. 게다가 198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서도 계속 제1세계 교회들에게 에큐메니칼 선교비를 요청하는 모순된 행동을 하기도 했다.

정봉덕 장로

<염천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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