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7인 목사 중 가장 어리고 학식 으뜸
3·1 독립운동 등 옥고 치른 민족운동가
1907년 9월 17일 한국 장로교회는 최초의 한국인 목사 7인을 배출했다. 이에 앞서 같은 해 2월에 이 7명의 목사 배출에 지대한 공을 세운 마펫 선교사는 각자의 인물 됨을 평하면서 양전백(梁甸伯) 목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양전백은 1893년 나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지금 36세로 일곱 사람 중에서 가장 나이가 적다. 그러나 학식에서는 아마도 가장 으뜸일 것이다. 그는 선천에서 동북쪽으로 약 60리 떨어진 구성의 새당 거리에 있는, 북한에서 가장 먼저 세례를 받은 김이련 노인이 운영하는 서숙(書塾)의 훈장이었다. 내가 선천에 들렀을 때 그는 김 노인의 권고로 나를 보려고 선천에 왔다.” 한국 장로교에서 배출된 최초 7인 목사 중 가장 나이가 어리면서도 학식에서는 으뜸이었던 양전백 목사는, 목회자 뿐 아니라 105인 사건과 3·1 독립운동 당시 옥고를 치른 민족운동가이기도 했다.
양전백은 1869년 3월 10일 압록강 근처 의주군 고관면 상고동에서 태어났다. ‘전백’(甸伯)은 ‘자’(字)요, 본명은 ‘섭’(燮), 호는 ‘격헌’(格軒)이었다. ‘전백’이라는 ‘자’를 가졌다는 것은 그가 유학을 중심으로 한 양반 가문 출신이었음을 말해 준다. 그는 비록 성리학의 사각지대인 평안도 출신이나 눌재(訥齋) 양성지(梁誠之)의 21대손으로 조선 전통 유학에 사상적 뿌리를 두었다. 그러므로 그의 유년 시절에 받은 교육이 어떤 것이었을지는 쉽게 짐작이 가능하다. “양전백은 유시로부터 조부모와 양친께 효도해 인근 동민과 가족들에게 총애를 받았고, 증조부 슬하에서 수학할 때 총명이 남다르며 지략이 뛰어났다.”
어릴 때 증조부에게 배울 만큼 그의 집안은 대가족이었고 전통 있는 유교 가문이었다. 그러나 가정의 경제 사정은 좋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극심한 빈곤을 겪으며 자랐다. “9세 때 가세가 기울어 파산했을 때 고향의 가옥과 전토를 팔고 의주군 고관면 관동리로 이주했다.”
1884년 그가 열네 살이 되어 글에 눈을 뜨기 시작하던 때에 그의 가족은 또 한 번 이사했다. 살림은 더욱 축소됐고, 양전백 일가가 정착한 곳은 의주군과 인접한 구성군 천마면 조림동 산골이었다. 아홉 살 때는 이사하는 것이 재미있었으나, 이번 이사는 그에게 좌절감만 가져다주었다. 소박한 농사꾼들이 사는 조그마한 촌락을 이루어 사는 천마산 기슭, 궁벽한 집은 과거로 입신출세하려던 그의 어린 꿈마저 삼켜 버렸다.
그러나 양전백은 구성 땅에서 그곳 사람들처럼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하지 않았다. 그는 농촌 아이들을 모아 한문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당시 조림동 거민은 농(農)으로 위업(爲業)하여 글을 모르고 책을 읽지 못했으며, 서당이 간혹 있었으나 ‘천’(天), 지(地), 현(玄), 황(黃)’ 밖에 알지 못했는데, 선생이 친히 훈몽(訓蒙)하여 많은 문자와 서책을 가르쳤다. 선생께서는 시간 여유가 있는 대로 겨울에는 독서하고, 여름에는 시를 지어 광음을 보냈다”라는 기록이 있다.
양전백에게 이런 생활이 흥미로울 리가 없었다. 학문의 어떤 수준에 도달해 거기서 삶의 의미를 찾게 된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그가 사는 땅의 생리에 맞추어 농사꾼이 된 것도 아닌 상태에서, 농촌 아이들을 데리고 기초 한문을 가르치는 생활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더구나 더는 개선될 것 같지 않은 가정의 경제 사정도 그를 괴롭혔다.
1888년 그는 열여덞 살에 집을 떠났다.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집을 나간 것이기보다는, 현실에 대한 불만과 현실 도피의 의미가 컸다. “1888년 무자년(戊子 年) 선생이 자기 시문이 부허(浮虛)한 것을 애석히 여기며 학문이 고격(孤隔)함을 분탄(憤嘆)해서 빈손으로 걸식하며 산령(山嶺)을 넘고 강을 건너 동서남북으로 유랑하다가 한곳에 이르니 의주군 송장면 일소촌이었다. 학문, 가정, 현실에서 뭔가 새롭고 참된 의미를 가져다줄 새 삶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의 출가는 이렇게 이루어졌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