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절은 청교도들이 1621년 새로운 정착지에서 지키기 시작했고, 1941년 미국 의회 결정으로 11월 넷째 토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킨데서 유래한다. 한국교회의 경우는 1904년 제4회 조선예수교공의회에서 서경조 장로의 제안으로 추수감사주일을 지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 구원하심과 인도하심을 감사한 기사들로 가득하다.
홍해를 건너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모세와 함께 부른 노래는 “주께서 백성을 구속하셨으며 주의 힘으로 그들을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셨다(출 15:13)”였고, 미리암과 여인들은 소고치고 춤추며 노래했다.(출 15:19~21)
민수기 15:17~20은 “그 땅에 들어가 그 땅의 양식을 먹을 때 여호와께 거제를 드리되 처음 익은 곡식 가루 떡을 제로 드리라”고 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먹을 양식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했다.(신 28:12)
시편의 경우 모든 시어들이 감사로 가득 차 있다. 바울도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교훈했다.(롬 6:7)
무엇을 어떻게 감사해야 하는가?
1. 추수를 넘어 구원의 감격으로
이스라엘은 광야 40년 동안 만나를 먹고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감사보다 불평이 많았다. 고기가 먹고 싶다. 무화과, 포도, 석류, 마실 물이 없다.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보챘다. 그러나 목말라 죽거나 굶어죽은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물량적 만족은 구멍난 물통과 같아서 끝 닿는데가 없다. 그러다가 고무풍선처럼 터지곤 한다. 그래서 우리의 감사는 관점을 추수에서 구원의 감격으로 바꿔야 한다.
치부하고 성공하고 건강하고 형통한 사건들이 감사의 조건일 수 있다. 그러나 절대적 조건은 아니다. 가시적 감사의 조건은 상대적이어서 변형할 소지가 크다. 그러나 구원의 은총으로 인한 감사는 보이지 않는 영적 사건이어서 시공을 초월하고 환경과 여건에 구애받지 않는다.
신명기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가라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 짓고 소와 양이 번성하고 은금이 증식되고 소유가 풍부하게 될 때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고 교훈한다.(신 16) 물량적 풍요보다는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의 주제로 삼고 조건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2. 감사의 생활화
오래전 모 대학교수가 무전여행 후 펴낸 여행기를 읽었다. 그는 배낭 하나 메고 세계를 여행했는데 풍토, 문화, 언어, 음식 등 적응이 무척 힘들었다면서 그러나 두 마디 말 때문에 비교적 쉬운 여행을 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것은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였다.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절기 때마다 펼치는 이벤트여선 안된다. 날마다 일마다 언제 어디서나 감사가 이어져야 한다. 그리고 입으로 몸으로 물질로 삶으로 감사해야 한다. 바울과 실라처럼 절망의 나락에 떨어졌더라도 감사가 떠나면 안된다. 감사는 감사를 낳고 원망은 원망을 낳기 때문이다.
큰 소리로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찬송하고 더 드리는 추수감사절이 되길 바라고 또 바란다.
박종순 목사
<증경총회장, 충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