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원은 황해도에서 옛날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무작정 서울에 왔다.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라 대중목욕탕에서 심부름, 모자가게 점원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였다. 그 후 의학 강습소의 급사로 일을 하면서 교재를 읽다가 용어를 모르면 옥편을 찾아가며 독학을 하였다. 그 당시는 의과대학에 다니지 않아도 시험에 합격하면 의사가 되는 시대였다. 2년간 주경야독으로 열심히 공부하여 20세에 의사시험에 합격하여 국내 최연소 의사합격자가 되었다.
그는 1937년 서울 성모병원에 의사가 되었는데 어느 날 뼈가 앙상하고 배가 볼록 솟아오른 어린이 환자와 어머니가 왔다. 아기 엄마는 평북 신의주에서 아기를 업고 꼬박 몇 날을 걸어서 왔는데 어렵게 낳은 아이라며 살려달라고 애원하였으나 끝내 죽었다. 그 후 복부 팽만으로 신생아들이 설사하다가 많이 죽는 때였다. 이때 그는 의사의 입장에서 원인모를 병에서 죽는 아이들을 고쳐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그는 이러한 병을 치료해야 하겠다는 사명감에서 영국 런던의대에 연구하러 갔으나 방법을 찾지 못하고 미국 샌프란시스코 UC메디컬센터로 갔으나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방법을 찾기 위하여 연구하다가 1964년 “유당불내증(乳糖不耐症)임을 알게 되었다. 20여 년간 의문이 풀려 이러한 증상의 신생아는 모유나 우유를 소화하지 못하여 영양실조로 죽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우유 대용품을 만드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여 그가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끓여 주었던 콩국을 떠올렸다.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에서 ‘정소아과’를 개원하여 우유대용품 개발에 전력을 다하여 두유를 개발하였다. 콩에는 단백질 40%, 탄수화물 35%, 지방 20%가 들어있지만 유당은 들어있지 않음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1973년 ‘정식품’이란 회사를 설립하여 두유생산을 하였으며, 콩이 식물성 우유라는 점을 착안하여 식물(vegetable)과 우유(millk)의 영문명을 합하여 ‘베지밀’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그가 연구하여 만든 베지밀은 지금도 두유업계의 1위라고 정재원 정식품 명예회장은 고백하였다. 그는 향년 100세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
김광식 목사<인천제삼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