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생명의 길을 따라온 걸음 정봉덕 장로 (20) 하나님이 부르신 곳에서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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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아선교봉사회’외교적 사명 감당하는 공식적 기관

나는 이러한 한국교회의 행동에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1980년대 중반부터 총회 사회부 총무를 마치면, 하나님의 은혜와 세계교회의 사랑에 보답하는 나눔의 선교를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1989년 총회 사회부 총무직을 사임하고서도 곧 이 일에 착수하지 못했다. 총회 자선사업 재단의 공주원로원 신축비 모금이 시급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후 2년 동안 재단일을 돌보면서 차근차근 나눔의 선교회 창립을 준비했다.

첫 번째로 해야 하는 일은 창립기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1991년 봄 독일 개신교개발원조국(EZE, 현재 EED) 한국 담당 라인더스 박사(Rev. Jan Reinders)가 내한했을 때, 이삼열 교수와 나는 나눔의 선교에 대해 설명하며 개신교개발원조국이 창립기금을 지원할 수 있는지 문의했고, 그해 가을 라인더스 박사로부터 긍정적인 화답을 받았다. 그때 받은 5천만 원은 한아봉사회의 종자돈이 되었다.

창립기금이 마련되었으니 이제는 사역현장에 나가기 위한 실질적인 준비가 있어야 했다. 나는 김용복 박사, 박창빈 목사와 함께 1991년 11월 24일부터 12월 5일까지 현장 연구를 위한 스터디 투어(Study Tour of Institutions of Ecumenical Diakonia in Euope)에 나섰다. 독일의 개신교개발원조국, 브레드 포 더 월드(Bread for the world)와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세계교회협의회(WCC) 본부, 바젤 미션(Basel Mission, 현재 미션21) 본부, 그리고 영국의 크리스챤 에이드(Christian Aid), 세계선교위원회(WMC) 등을 방문하여 자문을 구했다. 그때, 세계교회협의회 개발국(CCPD) 국장이던 오재식 박사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당시 인상적이었던 것은 독일교회는 국가가 받은 종교세의 일부를 교회의 사회봉사 사업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사회봉사가 국가 시스템 안에 안착되어, 신앙적 접근이 아닌 국가 차원의 사업으로 인식되어 있는 것이 매우 특별해 보였다.

1992년 10월 5일에는 유의웅, 윤의근, 노영우, 단필호, 임종빈 목사와 함께 인도차이나 선교현황을 살피기 위해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전 총무인 안재웅 선생의 협조로 태국 방콕에 다녀왔다. 인도차이나 국가들과 한국이 국교정상화가 되기 전이었다.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 태국을 위해 일하는 메노나이트(Mennonite) 선교사들을 초청하여 사회주의권에 있는 교회의 현장과 전망에 대해 듣는 시간을 마련했다. 버마 담당 선교사 맥스(Max Edger), 베트남 담당 카프만(Minh Kauffman), 라오스 담당 분미(Julkiree Boonmee)와의 면담을 통하여 그 지역의 현황과 교회의 실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 후 준비모임을 통해 탐방에 대한 보고를 하고, 준비위원회를 선정하고, 회의 명칭, 규칙과 취지를 초안해서 총회에 나눔의 선교회 창립을 제안하였다.

1992년 11월 23일, 장충동에 위치한 앰버서더 호텔에서 창립총회를 갖고 초대회장으로 박종순 목사를 선출했다. 당시 회원은 28명이었다. 창립총회의 중요한 안건 중 하나는 명칭을 정하는 일이었다. 우리가 세우려는 단체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한다는 점에서 ‘선교단체’이지만, 그 성격과 형태가 ‘나눔’에 있기에 ‘봉사단체’이기도 했다. 그래서 결국 이 두 가지 정체성을 모두 담은 ‘한아선교봉사회’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1999년 초, 외교통상부로부터 사단법인 등록 허가를 받기 위해 ‘한아봉사회’로 개명하게 되었다. 법인 허가를 받기 위한 준비 중, 단체명에 ‘선교’라는 말이 들어가면 종교 단체로 분류되어 허가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름을 바꾸면서까지 법인 허가를 받으려고 한 것은, 하나님의 사역이 사유화되는 것을 방지하고 대외 활동 시 공신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규정대로 20일 안에 외교부로부터 법인 인정을 받았다. 드디어 민간단체이지만 외교적 사명까지 감당하는 공식적인 기관이 된 것이다. 빠른 시일 안에 인가가 날 수 있었던 것은 캄보디아와 라오스의 대사들이 외무부 장관에게 한아봉사회가 민간외교에 공헌하고 있다는 추천을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선교의 대상으로는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로 시작하여 중국과 북한, 그리고 근동지역으로 점차 활동 영역을 넓혀 가려는 계획이었다. 첫 선교 현장을 인도차이나 지역으로 정한 중요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우선,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나눔의 선교 사역에 기꺼이 참가할 수 있는 교회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작게 시작하면서 선교 사역의 샘플을 만들어 보자는 의도였다. 그리고 넉넉하지 않은 재정을 생각하여 비교적 선교비가 적게 책정되어도 괜찮을 가까운 이웃 나라를 선정하자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한국교회가 지도하고 협력할 수 있는 나라면서 사회주의권 국가를 선정하자는 것이었다. 

정봉덕 장로

<염천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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