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이 따로 있나 정들면 고향이지 하는 노래가 있지 않습니까? 오셔서 좀 계시다 보면 처음에는 어색하고 힘이 드시겠지만 차차 이곳 생활에 익숙하게 되시면 그다지 심심치가 않으실 겁니다. 가끔 낚시도 하시고 책도 읽으시고 하시면요. 그리고 아버지! 좁은 땅에서 자리를 내주는 것도 애국하는 거예요 아버지!” 미국 LA에 있는 큰 아들의 말이었다.
“그래 네 말은 잘 알겠다마는 그래도 난 가지 않으련다. 외국엘 나갔다가도 내 나이가 되면 오히려 되돌아와야 할 판인데 나더러 그쪽으로 오라니. 덕수야!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는 게야. 덕수야 전화료 많이 나올라 이만 하자.” 황노인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자식에게는 못 당하게 마련인가보다. 유행가 가사에다 묘한 애국심 이론까지 곁들여서 설득하는 큰아들의 끈질긴 권유에 그만 황노인도 두 손을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황노인은 고국을 떠나던 전날 밤 늦게 뒤뜰에 있는 느티나무를 부여안고 생전 처음으로 얼마나 울었는지… 달빛 아래 가지만 남은 무궁화가 불쌍했고 길게 줄기만 뻗어있는 개나리가 슬프게 보였다. 이런 지가 벌써 7년이 넘었다.
미국의 첫 날은 황노인에게 있어서 신기하기만 했다. 깜빡 미국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어쩌면 어린 것들이 그 어려운 영어를 저렇게 잘하나 싶어 놀랬다가 곧 이곳이 미국이라는 것을 알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것도 서너 달 동안만 그러했을 뿐 끈끈한 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라는 것을 황노인은 깨달았다.
4층 높이보다 높은 야자수나무가 아파트 정문 앞에 보이고 노랑머리에 흰 얼굴이 보일 때마다 정이 들기는 커녕 오히려 두고온 고향이 그리워 미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견딜 수가 없어서 교회로 나갔다.
하나님을 믿어 구원을 얻는다는 마음보다는 그저 매 주간을 참고 견디면 동족을 만날 수 있다는 기다림에서 열심히 교회에 나갔다. 이 때문에 몇몇 친구의 소식을 들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행하게도 이미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나갔다는 슬픈 얘기였었다.
황노인은 알 수 있는 대로 주소를 찾아내 20여 통의 편지를 띄웠다. 그렇게 한 지가 오늘이 꼭 한 달이 지난 것이다. 우편배달부가 오후 2시면 오는 줄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황노인은 예외라는 것이 있지 않느냐는 마음에서 오전에 네 번이나 가 보았다. 오후에도 역시 이유는 기계가 아닌 이상 우체부가 좀 늦을 수도 있는게 아니냐는 생각에 네 번을 다녀왔다. 이러한 식으로 따진다면 편지를 띄우고 열흘이 지나서부터 하루에 여덟 번 이상은 오가고 했으니 여기에다 20일이면 160번이나 우편함을 보러 갔다온 셈이 되는 것이다.
오늘도 황노인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이틀만 있으면 새해가 되는데 한 사람의 편지도 받지를 못했으니 마음이 그지없이 서글프기만 했다. 황노인은 우편함 앞으로 다가섰다. 어제와 다름없이 아들이나 며느리에게 오는 우편물뿐이었다. 황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때였다. 신문지 틈에서 편지 한 통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허리를 굽혀 편지를 집어 들었다. 한눈에 그것이 한국에서 온 때늦은 크리스마스 카드임을 알 수가 있었다. “아니!!” 휘청거린 필체로 오한수 장로라는 글이 확대경 안으로 떠올랐다. “야! 오한수 너 살아 있었구나. 네가 살아 있었어!” 황노인은 편지를 가슴에 안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니 네가 장로라니? 야! 메리 크리스마스다!” 7년 전 고향을 떠나오던 전날 밤 뒤뜰에서 느티나무를 부여안고 흘리던 뜨거운 두 줄기 눈물이 이제는 주름살을 따라서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원익환 장로
<남가좌교회 은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