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 보이스 타운 < 3> 크리스챤 신문 및 대광학교 ⑥
장난기 있는 열아홉 살 총각들 발 씻겨 줘
제자들 발 씻던 주님, 다시 한번 떠올려
떠들고 놀려대던 이들, 울면서 기도해
청소년들에 꿈·용기 심어주며 보람 느껴
장난기가 온 몸에 밴 것 같은 열아홉 살 총각들은 심각해져야 할 장면에서 이렇게 떠들어 대며 앞장을 서는 것이 아닌가! 나는 잘못 시작했구나 하고 느꼈다. 그러나 시작을 했으니 끝을 내야 하겠기에 아이들을 차례로 앉히고 한 학생을 의자에 올려 놓았다.
“목사님, 나부터 씻어 주세요.”
다른 아이들이 제각기 자기를 씻기란다. 하여간 상황은 완전히 주님 당시와는 뒤집힌 것을 등골에 느끼며 첫 아이의 발에 손을 댄 것이다.
“아이, 간지러워요. 목사님, 좀 꽉꽉 주물러 주세요.”
이번에 또 간지럽다고 떠드니 모두 웃었고, 내 이마에는 구슬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사람의 발을 씻기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는 것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땀에 찌들은 남자들의 그 시커먼 발을 씻으면서, 제자들의 발을 씻던 주님을 다시 한번 우러러보게 되었다는 말이다.
나는 다음 학생을, 또 다음 학생을 땀을 축 흘리며 씻어 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이들 쪽에서 무엇을 느낀 것이 분명하다.
“목사님, 그만두세요. 그만하면 되지 않아요?”
넷째 학생이 발 씻기를 거부하는 것을 “아니다. 기왕 시작했으니 끝까지 하자”하고 묵묵히 그들의 발을 씻어 갔을 때에 방 안은 더욱 조용해졌다.
나는 얼굴에 온통 땀을 흘리며, 마지막 학생의 발을 닦아 주었을 때는 현기증마저 느끼도록 지친 것을 느꼈다. 나는 방을 나오면서 단지 이 한 말만 했던 것을 기억한다.
“내일 모레면 졸업하는 너희들이 아직도 생의 목표를 정하지 못했다면 말이 되니? 이 산을 내려가기 전에 무엇인가 결정해야 할 게 아니냐?”
얼마 후에 내 방에서 울음소리가 나고 야단이 났다는 소식에 깜짝 놀라 달려간 캐빈 안에서 나는 이상한 광경을 보고 말았다. 발을 씻어 달라고 오히려 떠들고 놀려대던 그들이 둘러앉아 울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닌가? 그 부르짖음은 지금도 내 귀에 쟁쟁하게 울려 온다.
“주여! 나도 발을 씻는 사도가 되게 하소서.”
“주여! 내 민족의 발을 씻게 하소서!”
주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열두 제자의 발을 씻어 주어 남을 섬기는 종의 길을 보이신 일을 본받아 교목으로서 학생들의 발을 씻어주던 그때 학생으로서의 느낌을 최완택 목사는 훗날(1980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꼭 20년 전(1960년-필자 주), 나는 그때 대광고등학교 3학년생이었습니다. 그해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교장을 비롯한 모든 선생님들을 모시고 3학년 학생 전원이 다락원 YMCA 캠프장에 가서 임간학교를 열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학생 전원이 빠짐없이 생활 부서를 하나씩 맡아서 학생 자치로 공동 생활하면서 이른바 ‘대광민주공화국’을 이뤄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학생들이 맡는 활동 부서 중에는 경비대라는 것도 있었는데, 이것은 가끔 심심찮게 습격하는 좀도둑이나 깡패들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경비대를 우리는 국경 수비대라고 불렀는데, 여기 편입되는 학생들은 평소 좀 거칠고 힘깨나 과시하곤 하는 건달 같은 친구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들은 따로 천막을 치고서 낮에는 자고 밤에 다른 학생들이 즐겨 노는 시간에 우리들을 지켜주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아침이었습니다. 우리의 교목이신 황광은 목사님이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서 대야에 물을 퍼가지고 그 경비대 친구들의 천막을 찾아 가셨습니다. 밤새도록 경비를 서느라고 지쳐 빠진 이 녀석들이 벌렁 자리에 누워서 더러 잠을 자기도 하고 농담지꺼리나 하고 있다가 뜻밖에 찾아오신 목사님을 보고 벌떡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구동성으로,
“목사님께서 여긴 웬일이십니까?”
“내가 밤새도록 수고한 자네들의 발을 씻어주고 싶어서 왔다네.”
목사님의 이 말씀을 듣고 이 친구들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목사님의 표정과 행동이 너무나도 진지하고 엄숙했는지라, 이 친구들 거절 한 마디 못하고 얼떨결에 목사님이 청하시는 대로 발을 내밀고 말았습니다. 목사님은 조용히 그 친구들 발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한 놈 두 놈 차례대로 발을 씻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그 녀석들의 무쇠 같은 얼굴에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마침내는 엉엉 소리내어 울고 말았고, 머리를 드신 목사님 얼굴에도 눈물이 한가득이었습니다.
나와 나의 동창들은 4월 19일날 데모하러 나가는 우리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또 우리들의 발을 씻어주신 황 목사님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대한소년단 간사장
해가 바뀐 1961년 봄, 황 목사는 갑자기 대광학교 교목직을 사임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 당시 대한소년단 이사직에 있던 독고선 선생과 이태완 선생이 찾아와 대한소년단 간사장을 맡아달라는 간청에 응해서였다. 실상 그는 언제나 자신이 직장을 구하느라고 애써본 적은 없었고, 그를 필요로 하는 일이라고 생각될 때는 응하곤 했기 때문에 그 때도 주위 요구에 이끌리어 간사장 직책을 맡기로 했다.
어쨌든 황 목사는 소년단을 좋아했고 보이스카우트 정신으로 청소년들에게 꿈과 용기를 심어주기를 원했고 보람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일생 소년단 관계의 일이 그를 따라다녔다. 그의 소년단 경력을 살펴보기로 하자.
1936년 – 용암포 소년척후대원 창설
1950년 – 한국보육원 소년대 창설
1953년 – 난지도에 소년시 설치
1958년 – 새문안교회 소년대 창설
필리핀 1st East Regional Scout Conference 참석
1960년 – 대광중학교 소년대 창설
1961년 – 미국소년단 간사학교 졸업. 대한소년단 6대 간사장 취임(1960년 10월부터 2년간)
1967년 – 대한소년단 무궁화 금장 및 공로상 수상
1968년 – 영암교회 소년대 창설
1970년 – 대한소년단 종교분과 위원장 피임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