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의 미학] 뜨거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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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장선 초등학교 3학년짜리 큰 외손자의 뒤를 따라가다가 ‘외할아버지 저 아파트가 우리집이에요’하며 손으로 가리키는 언덕 위 아파트를 보자 덕수는 갑자기 빨리 걸었다.

“이제 다 왔는데 천천히 가세요.” 아내가 숨찬 목소리로 뒤에서 타이르듯 말을 했다.

“빨리 오게나.” 덕수는 빨리 가서 왕눈이 막내 외손자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아침 저녁으로 전화기에 매달려서 하머이 바꾸라 하부지 바꾸라며 무슨 뜻인지 자기 혼자만이 아는 서너 마디 말을 연거푸 되풀이하는 귀염둥이다.

덕수는 손자 손녀들을 좋아했고 그중에서도 어린 쪽을 무척이나 사랑했다. 우선 어린 것들은 단순해서 잔꾀를 부릴 줄 모르는데다가 솔직해서 싫고 좋고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우영아!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오셨다.”

층계에 미처 올라가기도 전에 소리치는 큰외손자 목소리로 마치 기마전의 개시나팔이라도 불어댄 것처럼 함성이 쏟아져 나왔다.

“우영아!” 덕수는 현관에 들어서면서 양팔을 벌렸다.

그러자 왕눈이는 오히려 언제 소리쳤느냐는 듯이 히죽 황소웃음만 짓고 서있는 것이다.

“야! 우영아!” 덕수는 번쩍 왕눈이를 들어 올렸다.

“할아버지 좋지?” 역시 웃고만 있다. 아무리 조숙했다 하더라도 이제 두 돌밖에 지나지 않은 애가 마치 큰애처럼 쑥스러워 하는 모습을 하니. 그래서 덕수는 더욱 귀여워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밥상에 둘러 앉았다. 그러나 왕눈이는 한바탕 좋아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야단법석을 치더니 힘이 빠졌는지 소파에 가서 TV만화만 보고 있는 것이다.

“빨리 와서 밥 먹으라니까!” 몇 번이나 말을 해도 끄떡도 하지 않자 어미는 긴 구두칼을 들어 보이면서 밥을 먹지 않으면 매 맞을 거라고 큰소리로 윽박질렀다. 그래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너 셋까지 셀 동안 오지 않으면 정말 매 맞을 줄 알아!”

사태가 이쯤 되자 덕수도 수저를 놓고 왕눈이의 거동을 지켜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나!” 구령을 하듯 큰소리로 외쳤다. 이때였다. TV만 열심히 보고 있던 왕눈이가 느닷없이 목청을 가다듬고 자기 어미와 똑같은 음성으로 소리를 질렀다. “둘!”

덕수는 다급하게 말을 했다.

“글쎄, 지금 보지 않았냐! 때리겠다고 하나! 하는데 장난인 줄 알고 둘! 하지 않았냐. 뭘 알아야 야단이고 매질이고를 하는 거지 모르는 애에게 그랬댔자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

밥상을 물리자 모녀가 큰 외손자만을 데리고 더덕과 물건이 좋으면 버섯까지도 사오겠다며 나간 지가 퍽이나 되었는데 아직 돌아오지를 않았다.

덕수는 왕눈이와 그림 그리기, 그림 짜맞추기 등을 하면서 함께 놀아주었다. 그러나 몇 번이나 같은 것을 되풀이하면 싫증을 일으킬 것 같아서 이번에는 소방차와 짐차를 밀고 끌고 하면서 방안을 수없이 돌았다. 무릎이 아프고 팔목이 저렸다.

“우영아 좀 쉬었다가 하자. 이제 곧 엄마와 할머니가 형아와 같이 올거야.”

원익환 장로

<남가좌교회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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