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을 읽다 보면 안타까운 장면들을 가끔 만나게 된다. 다윗의 밧세바 사건도 그 중의 하나이다. 다윗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중에서도 손꼽히는 인물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신앙심이 매우 돈독한 하나님의 사람이다. 인품이 고결하고 관대했다. 사울의 온갖 학대와 모욕을 참아냈다. 자신의 생명을 노렸음에도 진심어린 사랑으로 대했다.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 왕에게 충성심과 신실함으로 대하는 모습은 참으로 빛나 보인다. 밧세바 사건에서는 비겁하고 비열하고 이기적이요 천박한 사람으로 돌변해 버렸다. 살인자가 되었다. 아! 죄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솔로몬은 구약 인물 중 가장 지혜롭고 정신이 맑고 건전했던 인물이다. 죄는 진리를 교묘하게 왜곡시킨다. 죄에는 항상 양심의 가책이 따른다. 죄에 대하여 변명을 하지 못하게 한다. 죄는 양심을 마비시키고 눈을 멀게 한다.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고 제압한다. 옳고 그른 것을 안다고 해서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아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 주는 것이지 죄를 치료해 주는 것은 아니다. 범한 죄에 대하여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것은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기도 하다.
성경적 죄는 현대 심리학이 말하는 유전적 요인을 무시한다. 경건한 아버지에게서 그토록 쓸모없는 방탕한 아들이 태어난다. 변변치 않은 아버지에게서 그토록 훌륭한 아들이 나와서 하나님께 충성하고 열심히 개혁 활동을 수행해 낸다.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가인과 아벨, 야곱과 에서는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인간의 타락은 어느 것 한 가지도 부족할 것이 없는 에덴동산에서 발생했다.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리우며 유대 민족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은 우상을 숭배하는 족속 가운데서 나왔다.
지금도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가정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들이 얼마든지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것을 본다. 한 순간의 욕심을 떨쳐내지 못한 때문이다. 거칠고 부족하고 가난한 환경에서 많은 교육을 받지 못하고 인격적으로 빈약한 부모 밑에서 얼마든지 훌륭한 자녀들이 배출된다. 같은 환경에서 자란 형제자매들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한다. 유능한 사람도 얼마든지 잘못을 저지를 수 있고 범죄할 수 있다. 지혜의 상징, 솔로몬 왕이 말년에 우상숭배에 빠졌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다윗도, 솔로몬도 죄의 원인은 여자의 유혹에 미혹되었기 때문이다. 왕관이나 왕복 심지어는 주교관(主敎冠)도 죄를 막거나 은폐시킬 수 없다. 죄의 성격은 교만이며 자기기만이다. 죄는 항상 욕심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죄가 주는 만족과 즐거움은 잠시 뿐이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어리석게 행동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둘로 갈라지게 되었다.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이다. 열 지파가 반역하여 북왕조를 이루고 그 지도자는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는 벧엘에, 다른 하나는 단(Dan)에 세웠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굳이 예루살렘까지 올라갈 필요가 없다고 했다. 자기 멋대로 성전을 짓고 제사장을 안수하고 특정한 절기를 정했다. 금송아지를 숭배하게 했다.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겼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모욕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양심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르호보암은 솔로몬의 아들이다. 왜 노인들의 교도(敎導)를 버리고 젊은이들의 조언을 따랐을까? 의아스럽다. 르호보암의 교만 때문이 아닐까?
평생동안 하나님께, 주님의 몸 되신 교회를 위하여 충성, 헌신하던 목사님이 인생 끝자락에 사적(私的)인 욕심에 미혹되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한국 교회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모습을 본다.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는다. 그동안 받아 오던 사랑과 존경을 한순간에 잃어버린다. 그 작은 욕심을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윗의 위대한 점은 잘못을 즉시 인정했다는 것이다. 나단 선지자의 지적과 책망을 받고 한마디도 변명하지 않고 통회, 자복, 회개하면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다. 하나님께 합한 인물이 될 수 있었다.
김용관 장로
<광주신안교회·한국장로문인협회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