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성탄절과 새벽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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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 시절을 회상하면 물질은 빈약해도 마음과 정만큼은 풍성했던 기억이 난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거리엔 크리스마스 캐럴이 넘치고, 빈한한 속에서도 발걸음은 경쾌한 기대로 가득했던 시절이다. 그때보다 의식주 물질이 풍성한 지금 인심과 인정이 각박함을 보게 된다. 캐럴은 사라지고 걸음은 무겁고 어깨가 움츠러듬을 볼 수 있다. 누군가 외쳤던 기억이 떠오른다. “물질과 영성은 반비례한다.” 물질에 매이면 매일수록 영성은 곤핍해짐을 이르는 말이다. 

우리 인생이 경제가 어렵지 않거나 위기가 아니었던 때는 없다. 늘 어렵고 위기인 것이 인생이요 삶이다. 문제는 마음 자세이고 중요한 것은 마음의 근본인 ‘영성’이다. 잠언 기자는 단언한다.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 4:23). 곤고함 속에서도 다윗은 이렇게 노래한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 내 영혼이 여호와로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시편 34:2).

2023년 성탄의 계절에 주위 환경을 둘러보면 마음의 평화를 놓치기 쉽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끝없는 여-야 정쟁, 경제 위기, 환경 위기, 바이러스 위기…

예수님 탄생 당시, 이스라엘, 중근동 지역 역시 역경과 위기의 시대였다. 로마-이스라엘, 이스라엘-에돔(이두메), 사두개-바리새-엣세네 파 사이에 충돌, 다툼, 파괴가 깊어가고 있었다. 이때 아기 예수의 탄생은 야심가들에게 큰 도전과 위협이었다. 결국 영아대학살이 벌어졌고 요셉-마리아-아기 예수는 망명의 길을 떠나야했던 것이다. 혼란한 위기와 풍랑 속에서도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선포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성탄절’, ‘크리스마스’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상징들이 있다. 크리스마스 트리, 크리스마스 카드, 산타클로스, 성탄선물, 구세군 자선남비, 긍휼사역, 크리스마스 캐럴, 새벽송… 

크리스마스 트리, 카드, 성탄선물은 점점 화려하고 풍성해진다. 산타클로스는 전 세계 모든 이가 환호하다 보니 성탄절 주인이 산타클로스인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반면, 새벽송은 그 출발지였던 영미권은 말할 것 없고 한국교회에서도 그 존재감이 사라지고 있다. 물론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 산업사회에서 도시사회로의 급격한 전환은 새벽송이 더 이상 어려울 수밖에 없는 개인주의 및 초개인주의 환경을 만들었다. 오늘날의 다양하고 상이한 생활패턴, 과잉 소음에 대한 과민한 반응 등이 대도시에서의 새벽송을 불가능하게 함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새벽송의 원정신을 잊지 말아야 한다. 새벽송은 ‘성탄절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보여준다. 메시야 탄생을 알리는 가브리엘 천사의 ‘탄생 고지’와 함께 메시야 탄생의 기쁜 소식을 이웃과 함께 공유하는 것이 새벽송의 원정신이다. 전쟁과 정쟁, 갈등과 불안, 병마와 고통에 신음하는 모든 이를 위한 구원과 소망의 메시야 탄생을 전하는 것, 이것이 새벽송의 정신이다.

지금도 새벽송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기독교와 교회 이미지가 그 지역사회에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징표이다. 지금도 새벽송이 가능하다면, 그 교회 구성원들이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사랑과 정열이 살아있다는 징표일 것이다. 새벽송은 성탄의 주인공, 교회와 역사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선언하고 대변하는 것이다. 각 지역, 교회, 구역마다, 각 삶의 자리마다 새벽송의 방식은 다를 수 있고 유연하게 적용될 필요가 있다. 각 부서, 지역, 또래 그룹마다 교회, 특정 가정, 특정 장소, 자신의 가정에서 주님의 탄생을 기뻐하고 축하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이 새벽송의 정신이다. 형식보다는 내용, 외양보다는 정신과 본질이 중요하다. 역사의 흐름과 시대 변화에 따라 교회의 외양과 예배 방식이 전환되듯, 시대와 정황에 따라 새벽송 방식도 바뀔 수 있다. 여전히 중요한 것은 새벽송의 정신이다. 

그때, 그 시대 이스라엘 중근동 지역에 메시야 탄생의 소식이 전해졌던 것처럼, 지금 이때, 한국 사회 속에도 메시야 탄생의 소식이 다시금 힘차게 전해질 수 있어야 한다. 암울과 우울에 빠졌던 사람이 새 희망을 발견하고, 두려움과 불안에 떨던 사람이 새로운 용기를 얻고, 냉소와 회의에 빠졌던 사람이 새 기쁨을 회복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적어도 한해의 끝자락 12월은 감사를 발견하는 시간이어야 한다. 

문제 많고 죄 많은 세상에 하나님 ‘어린 양’(agnes Dei)으로 오신 아기 예수 앞에서, 쥐었던 주먹, 들었던 돌 내려놓고, 함께 손잡고 조용히 ‘새벽송’ 부르는 ‘성탄절’ 될 수 있기를 조용히 기도한다.

“그 어린 주 예수 눌 자리 없어, 그 귀하신 몸이 구유에 있네.

 저 하늘의 별들이 반짝이는데, 그 어린 주예수 꼴 위에 자네.”

이규민 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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