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청빈과 경건의 사람 < 4> 영암교회의 목회 ④
그리스도 정신 이탈 막으려 적극 지도
여전도회 대내‧외적인 봉사로 헌신
예술 활동 통해 선교의 성과 기대
봉사로 교회 하나될 수 있음 믿어
더욱이 교회 안에 있어서의 소년단 운동에 대해서는 교회 소년단이라고 모두 단조로운 취미만 가지라고 할 수 없다고 보았고, 오히려 교회의 소년 지도자들이 한 걸음 나아가서 소년의 요구 속에 뛰어 들어가 그 요구가 그리스도 정신에서 이탈되지 않도록 적극 지도해 주어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를 배경으로 한 소년단이 많이 생겨서 소년들이 봉사 하고 싶어하는 욕구를 만족시키고 따라서 기독교 소년단의 수가 많아지는 것이 바로 한국 소년단으로 하여금 세계 수준에 올라설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교회는 소년단을 소유해야 하고 또 육성단체가 되어 주어야 한다는 생각 – 이것이 그로 하여금 새문안교회 부목사 시절에 소년단을 조직하게 했다. 그리고 영암교회에서 시작한 그 소년단은 교회의 자랑이요 희망인 동시에 그가 가장 마음 흐뭇하게 생각하며 기대하던 소년의 모임이었다. 그들은 교회의 행사가 있을 때, 또 어려운 일이 생길 때면 늘 앞을 다투어 봉사하기를 즐겼다.
매포에서 학생 수양회가 열렸을 때의 일이었다. 첫날 강물에서 수영을 즐기던 소년단원들이 물에 빠져 떠내려오는 시체를 발견하고서는 물에 뛰 어 들어가 그 시체를 끌어 내온 일이 있었다. 그것을 어른들이 보고 집에서 어리게만 보던 그들이 이렇게 용감할 수 있었던 것은 소년단 유니폼을 입힌 덕이라고 하면서 감탄을 했었다.
1969년에는 교회학교 안에 무용부를 창설하였다. 교회 안에 무용부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앞으로의 선교 방법은 음악이나 연극 또는 무용 같은 예술 활동을 통해서도 큰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예수께서 수가라는 동네 야곱의 우물가에 앉으셔서, 물 길러 나온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는 장면(요 4:3~19)을 여학생들이 무용으로 아름답게 표현해 주었을 때, 그때 그 장면을 실제로 눈으로 보는 것 같은 감명을 느껴본 적이 있었다.
이렇게 때묻지 않은 여학생들의 순진한 무용 솜씨는 계절 때마다 드리는 축하예배 때에 교우들이 가장 기다리는 축하 순서 가운데 하나가 되어 교우들을 즐겁게 해 준 것은 물론이려니와 교도소나 육군사관학교 등에 방문을 갔을 때 많은 환영을 받았고 그들에게 많은 위로를 주었던 것이다.
황 목사가 목회를 하면서 각 기관을 위해서 쓴 연극 작품으로는 주일학교용으로 <말하는 당나귀>, <지붕 위의 크리스마스> 등이 있고, 학생용으로〈노인장의 봄>, 여전도회용으로 <민족을 내게 주소서>(에스더 이야기), <아베마리아>(신약성서에 나오는 여성들) 등이 있다. 이처럼 그는 직접 연극을 제작하여 지도해 주어서 언제나 축하순서는 다채롭곤 했다.
영암교회에서 봉사는 학생회, 청년회, 교회 전체의 모토가 되어왔지만, 그 중에서도 여전도회의 활동은 눈부신 바가 있었다. 언제부터 그런 기풍이 형성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영암교회 여전도회는 마치 선전 포고령을 기다리는 병사들과도 같았다. 무슨 할 일이 생겼다 하면 앞을 다투어 궂은 일이나 귀찮은 일을 가리지 않고 척척 해 냈다.
대내적인 봉사뿐이 아니었다. 대외적으로도 예수님께서 병든 자, 가난 한 자, 눌린 자, 옥에 갇힌 자를 찾아 위로하시던 그 정신을 본받아 시립 아동병원이나 원호병원, 각심학원, 군인 휴식소, 윤락 여성 수용소, 교도소, 양로원, 고아원 등에 찾아다니며 위로의 손을 펴는 것이 회원들의 기쁨이 되었고, 개척교회 전도와 맞먹는 여전도회의 귀중한 사업이 되고 있었다.
그 무렵 예수교 장로회 전국 여전도회 연합회 사회부에서 주최하여 장마철마다 생기는 수재민을 위해서 이불 100개를 만드는 사업을 벌였던 일이 있었다. 영암교회에 배당된 숫자는 다섯 개였다. 영암교회 여전도회에서는 이런 봉사가 민족의 고난에 조금이라도 동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고난주간, 그중에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금요일 밤에 교회 집회를 마치고 한자리에 모여 이불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 결과 천 조각을 모아서 솜이불 20여 개를 거뜬히 만들어 놓고 우리들은 서로 대견하게 생각하며 기뻐했던 적이 있다.
황 목사의 교회관은 다음과 같았다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왜 교회가 하나로 되어야 하느냐 하는 뜻을 우리 자신이 각각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교회는 한데 뭉친 지체 역할을 해야 한다. 따로따로 흩어져 각각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싶지만, 지체이기 때문에 서로가 통하고 연결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목사인 그는 일반 교우들에게는 진정한 신앙의 모습을 교육하기에 힘썼고, 개인적으로는 개인의 인격을 존중하며 이해해 드리면서도 수차에 걸쳐 올바른 신앙 노선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당부하곤 하였다. 현대를 사는 참 신앙의 모습은 기적 없이는 믿을 수 없다는 신관이 아니라,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시는 순간에도 약속을 믿고 그것을 따르는 믿음, 기적 없는 곳에서도 고난을 따라가며 남을 위해 사는 신앙을 지향해 나갔다.
교회는 예수의 몸을 대신했고 움직이는 몸이 교회요, 성도는 지체들이기 때문에 교회가 행동을 멈춘다면 결국 하나님의 사업을 방해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 몸을 받고도 움직이지 아니하면 예수의 살을 썩히는 결과요, 만일 내 손이 게으르면 나는 하나님에게서 시간을 훔치는 결과가 된다.
그는 말하기를 봉사가 아니고 어찌 교회가 일치할 수 있으며, 봉사가 아니고 어찌 복음이 증거될 수 있겠는가. 아직도 교회적으로는 교회가 분리 되게 되어 있지만, 봉사로써 교회를 하나로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황 목사가 바라던 목사부인의 위치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한국 교회에 있어서의 목사부인의 이미지는 첫째로 부인 때문에 교회에 말썽이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부인은 일하다가 욕먹는 것보다 잠잠하고 있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여, 능력이 있든 없든 남의 눈총을 피하고 활동의 부자유를 느끼더라도 무난하게 지내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목사부인이 부닥치는 또 한 가지 문제는 여전도사와의 관계인 것 같다. 대개 교역자와 여전도사의 관계에 목사부인이 개입되면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다. 목사부인은 부인이지 목사가 아닌 이상 자신은 평신도라는 자각이 중요하다.
대개의 경우 목사는 대외적 세계적 안목을 가지고, 전도사는 대내적 현실적 안목을 가지기 쉽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사고의 차이와 견해의 차이를 가져오기 쉽다. 영화에도 주역과 조역이 있듯이 목사인 주역과 전도사인 조역이 자신의 위치를 잘 지키면 될 것이고, 목사부인은 오히려 두 교역자를 객관적인 위치에서 관찰하여 목사에게 여전도사를 이해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