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만 열면 평화를 부르짖으면서 평화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평화를 사랑하고 평화를 애호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 세상에 갈등을 좋아하고 전쟁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면 진정한 평화는 무엇인가?
서양고대 말기 혼란기에 진정한 안정과 평화를 염원하던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354~430)는 그의 저서 신국론(De Civitate Dei)에서 “정의가 없는 국가는 강도 떼와 같다”라고 했고, “정의란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주는 것”이라고도 했다.
인류역사를 되돌아 보면 강한 군사력을 가진 국가의 독재자들이 약소국가들을 침략하여 억압적인 식민통치를 많이 하였다. 정복지의 안정과 혼란을 극복하고 평화로운 국가를 이룩한다는 구실하에 약소국가의 국민들을 포로로 붙잡아 노예로 삼아 강제노역을 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독재자들이 자신의 통치체제에 순응하지 않을 경우, 피정복민들을 가차 없이 처형하기도 했다. 따라서 그런 국가사회는 평화로운 것 같지만, 강요된 안정과 평화가 있을 뿐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을 중심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이룩한다는 미명하에 국제공산주의 운동이 전 세계에 확대되었다. 특히 빈부격차가 많은 봉건국가에서 적폐를 청산한다는 명분하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희생을 당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 앞에 인권이나 인간의 생명의 존엄성은 무참하게 짓밟혔고 강요된 평화만 있을 뿐 진정한 평화는 찾아볼 수 없었다.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기습 남침하였다. 평화스럽던 한반도가 갑자기 전쟁터로 변했다. 이승만 정부는 부산으로 피난을 갔고, 피난민들이 남녘을 향해 봇물을 이루었다. 대한민국은 사라질 위기에 봉착했다. 이때에 195만 명이 참전하여 국군과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의 반격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이 기적적으로 다시 회복되었다. 이때의 6‧25전쟁으로 인해서 국군 13여만 명과 유엔군 3만 8천여만 명이 전사했고, 10만 3천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아울러 6‧25전쟁으로 인해서 1천여 만 명의 이산가족이 발생하게 되었다.
우리 민족은 1천년 이상 역사와 전통을 함께 해 온 한민족으로서 지난날의 아픈 상처를 청산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 필연적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아직도 인간이 천부적으로 누려야할 말할 자유, 모일 자유, 글을 쓸 자유, 신앙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 등 인간의 기본적 자유를 통제 내지 억압하고, 순응하지 않으면 교화소나 수용소로 보내고, 심지어 처형하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처럼 독재정권의 강요된 복종의 평화가 진정한 평화인가 냉정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자유는 공기와도 같은 것이다. 미국 독립운동을 할 때 패트릭 헨리(P. Henry)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영국의 비국교들이 1620년 메이플라워(Mayflower)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으로 건너가게 된 동기도 자유로운 신앙의 자유를 위함이 발단이 되었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게 통치이념을 선택하여 살아갈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공산 이념이 생명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논리는 궤변이다. 인류역사는 사상과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자연법적 진리를 누구도 인위적으로 막을 수 없다. 더욱이 한 나라의 통치자는 그 나라 국민을 위한 봉사자이다. 통치자가 국민 위에 군림하고 민의를 무시하고 나라의 권력을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은 독재자의 폭거다. 독재자의 강요된 평화가 청산되고, 인간의 천부적, 자연법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진정한 평화로운 사회가 북한 땅에 어서 속히 도래하기를 소망한다.
조인형 장로
– 영세교회 원로
– 강원대 명예교수
– 4.18 민주의거기념사업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