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드톡] 심판의 때와 위로의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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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에게는 두 가지 모습이 있다. 하나는 심판의 선포이고 다른 하나는 회복과 위로의 말씀이다. 심판은 당시의 타락하고 부패한 시대 상황에 대한 엄중한 경고와 책망의 메시지이며 위로는 심판 이후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긍휼을 선포하는 것이다. 오늘날 강단에서 이루어지는 설교도 마찬가지다. 마치 선지자가 행했던 심판과 위로를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이끄는 영적 선포다. 

내 아내는 종종 내게 심판하고 책망하는 설교는 하지 말라고 한다. 교인들이 설교를 들으며 혼나는 것 같아 불편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 말을 듣는 날이면 나는 조금 마음이 힘들어지고 그래서 그다음 주에는 어떻게든 위로의 말씀을 준비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설교는 설교자의 고민과 영적 감동 아래 이뤄지는 사역이니, 내 고민과 시대에 대한 불편함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설교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20세기 신학자인 칼바르트(Karl Barth)는 “한 손에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 들고 사는 것이 우리 설교자의 삶”이라고 했다. 성경과 신문이란 무엇인가? 요즘 나는 뉴스를 가급적 보지 않으려 한다. 아니 듣지 않으려 한다. 뉴스는 한 번도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하나같이 문제투성이다. 그것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언론은 이념에 따라 각자 다른 말을 하고 있다. 똑같은 것을 보고도 서로 다른 소식을 전하는 뉴스를 듣자면 짜증이 난다. 차라리 상식과 기초적인 사실만 전하는 것이 낫겠다 싶다.

 우리 판단의 근거와 기준은 오직 성서와 하나님의 말씀뿐이다. 이념의 안경을 쓰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와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해석하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어야 한다. 우리는 이념의 공동체가 아니라 신앙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한국교회는 신앙과 성서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가? 신문을 성서와 함께 읽어야 한다는 바르트의 권고는 어디에도 없다. 교회의 이해관계에 따라 목회자의 이념에 따라 설교하고 신문을 해석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설교가 아니다.

과연 오늘 우리는 정의의 편에 서 있는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가? 신앙적 설교는 존재하는가? 교회와 설교자의 기득권을 위하여 권력의 편에 서서 정의롭지 못한 것들을 지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심판이 끝은 아니다. 위로는 언제나 함께 한다. 조금만 더 책망 받고 위로의 시간을 갖자. 조금만 더 불편해하고 회복의 시간을 갖자. 그때가 되어야 한다. 지금은 심판과 책망의 때다. 조금 더 기다리면 위로의 시간이 올 터이다.

유해근 목사

<(사)나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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