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청빈과 경건의 사람 <4> 자상한 아버지, 인자한 거장 ①
세월 흐름 속에 아버지상의 모범 됨
교회·가정 아버지로 너무 훌륭한 분
인품, 후배 목사들에 귀감·존경 대상
본인 돌봄 없이 시시때때로 일 매진
황광은 목사님이 영암교회에서 시무할 때 영암교회 교회학교 학생이었고 대광초등학교 학생이었던 김삼영 목사는 ‘어린이들의 자상한 아버지 황광은 목사’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황광은 목사님의 아버지상은 30여 년이 지나서 세월의 흐름 속에 아버지가 된 우리들에게도 모범이 됩니다. 아버지가 된 지금 그분이 아이들에게 베푸신 사랑을 우리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어릴 적에 나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좋은 친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덕으로 항상 꼬마 손님으로 황 목사님 댁을 수시로 드나들 수 있었습니다. 나와 황 목사님의 막내아들 승국이와는 둘도 없는 단짝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목사님 댁에서 목사님을 개인적으로 뵐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곤 했습니다. 세월이 지나 내 자신이 목사가 되고 아버지가 되고 보니 이제야 목회자로서 그리고 아버지로서의 의무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황 목사님은 교회에서는 목회자로서 그리고 가정에서는 아버지로서 너무나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목사들에게는 목회자상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목사가 가지는 성품과 인격 그리고 신앙이라고 합니다. 황 목사님의 인품은 많은 후배 목사들에게 귀감이 되시며 존경의 대상이 된다고 들어 왔습니다. 목사님은 내가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이셨고, 대광초등학교 때 교목이셨으며, 단짝 친구의 아버님이셨습니다. 지금도 기억되기는 승국이네 집에 놀러 가는 것이 제일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황 목사님이 계시면 재미있는 최신 동화 이야기를 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어린이 잡지 ‘새벗’의 최신호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나는 항상 승국이가 부러웠습니다. 승국이는 항상 재미있는 동화를 아버지로부터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일날 교회에서 듣는 황 목사님의 설교는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영암교회에서는 자주 어른과 어린이들이 함께 예배를 드리곤 했는데, 어린이 설교를 먼저 하시고 분반 공부를 위해 어린이들이 나간 후 어른 예배를 계속하셨습니다. 미국에 와서 보니 많은 교회들이 부모님과 처음 예배를 같이 드리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방법을 황 목사님께서는 벌써 30년 전에 시행하셨던 것입니다. 부모님과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어린이들에게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월간 ‘기독교교육’ 창간
전국복음화 운동이 끝나면서 황광은 목사는 병상에 눕게 되었다. 과로에서 온 병이었을 것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황 목사는 자기가 왜 아픈지 얼마나 아픈지를 말하지 않았다. 그는 병상에 누워서 소년시 출신 청년에게 쓴 미완의 편지 두 통을 남기고 있는데, 그 편지에서 자신의 심정을 말하고 있다.
규희 형, 편지 받아 보고도 이렇게 회답이 늦었군요. 가나안 농장에 가 있는 것은 영적 훈련과 아울러 평소에 강 군이 생각하던 전원생활과도 결부되므로 적당한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전 최호 사장님 만나 뵙고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강 군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고생을 그렇게 하는데도 이렇다 할 길이 열리지 않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고 늘 생각은 했으나, 이 세상은 착하고 정직한 사람만이 존경을 받는 세상이 못 되는 것이기에 강 군이 가는 길이 열리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비뚤어진 길을 갈 수는 더욱 없는 것이 아니겠소?
노력도 황소 걸음, 괴로워도 의인의 길을 꾸준히 걸어가는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강 군에게 우리 두 사람이 바라는 것은 이제 세상의 쓴 맛 단 맛을 다 보았다고 생각하나 이제는 좀더 어른의 길-그러니까 모든 괴로움을 가슴에 품고라도 굳세게, 그러면서도 지혜롭게 살아가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나는 비록 무질서하게 살아가지만 그저 바라는 것은 모두가 행복해지기를 위해서라면 언제나 나는 사회사업이나 자선사업에라도 다시 돌아갈 생각이 있습니다. 그럼.
여기까지에서 편지는 일단 일단락되었다. 펜을 멈추었다가 며칠 뒤에 다시 쓴 것인지 편지 끝에 “여기까지가 1965년 12월에 쓴 것”이라는 메모가 있고, 줄을 바꾸어서 다음과 같은 말로 편지가 끝맺어져 있다.
요사이는 어떻게 지냅니까. 다시 편지 주시오. 나는 그 후 교회 일 전담하고 정진중입니다. 언제 한번 집에 오시기 바랍니다.
그럼 안녕히, 추위에 몸조심하시오. 형으로부터
그 무렵에 쓴 또 한 통의 미완의 편지가 있다. 수신인의 이름은 밝혀져 있지 않고 그저 ‘김 형’이라고만 되어 있다.
병석에서 신음하는 김 형에게 뵙지 못하고 글월을 드리게 되어 미안합니다. 그 동안 얼마나 괴롭고 답답했습니까.
나도 몇 해 전 3개월 가까이 병석에 누워서 바깥세상을 그리워하던 일을 기억합니다. 그때 나는 영영 태양빛이 힘차게 내려 쏟는 길을 다시는 걸어볼 수 없을 줄 알았고 그렇기 때문에 단 한번이라도 분주하게 지나던 내 일터에 나가 보았으면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또 어떤지 아십니까? 건강을 되찾은 후에 또다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격무에 시달리다가는 단 하루라도 좋으니 침대 위에 누워서 쉬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순된 인생의 전부입니다. 또 내가 김 형에게 알려드리고 싶은 진리의 한 측면인 것입니다. 인생은 나고 자라고 늙고 병드는 것이 보통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생 행로에서 생애의 의미를 지니고 사느냐, 아니면 생을 저주하며 사느냐의 태도가 다를 것뿐입니다.
이 편지는 여기서 미완성인 채 끝나 있다.
편지 그대로 황광은 목사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시간만 나면 일을 하려 애썼다. 그가 주동이 되어 대한기독교교육협회 주최로 전국대회를 연 것도 그 무렵이다. 그리고 격월간지 ‘기독교교육’을 창간해 그 주간 일을 보았다.
‘인생열차’ 차장
1960년대 후반기는 황 목사에게 생애 중 가장 바쁜 때였다. 교회와 사회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가정에서까지 불우한 이웃을 생각하고 한국 교회와 사회를 생각하고 있었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