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란 예수를 믿는 사람이다. 복음주의자란 이단(異端)이 아니고 정통 신앙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다. 성경에 기초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거짓된 교리를 가르치는 자들이 나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리들이 들어와 하나님의 양떼를 유혹하고 해친다”는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된 지 100년도 못 되어 스콜라주의(Scholasticism)가 들어 왔다. 철학적 탐구와 인지(認知)와 인식의 문제를 신앙과 결부시킨 철학 사상이다. 11~17세기 유럽에서 유행했다. 개혁 신학에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반작용으로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교리 분열이 시작되었다.
초대 고린도 교회는 자기들이 선호하는 설교자들에 따라 분열이 되었다.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라고 했다. 또 고린도 교회는 신령한 은사(恩賜)들의 문제가 야기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은사들을 교회의 연합과 덕을 세우는 데 사용했어야 마땅하지만 은사들을 남용하여 분열의 원인을 만들었다. 서로 시기하고 질투한 것이다. 현대 은사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교리가 문제가 아니라, 성령이면 족하다고 주장한다. 오순절 주의나 오순절 교회가 이에 가깝다.
교회는 부단히 개혁되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아래 있어야 한다. 진리와 평안의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연합할 수 있어야 한다. 참된 복음을 보전하기 위함이다.
복음적인 사람의 특징은 성경적이다. ‘오직 성경으로만’(Sola Scriptura)이 슬로건이다. 성경만이 오직 유일한 권위이며 성경 말씀에 자신을 복종시킨다. 복음주의적인 사람은 ‘항상 깨어있는 사람’이다. “깨어 기도하라”,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정사(政事)와 권세와 이 어둠의 세상 권세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복음주의자는 이성과 철학을 믿지 않는다.
초대 교회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이 남긴 유명한 말이다. “예루살렘이 아덴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성전이 스토아 학파(Stoicism, 고대 그리스, 로마 철학 사조, 금욕주의 이성에 따르는 삶, 자연과 신을 동일시)의 학문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는 교회로 들어 온 헬라 철학을 몰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철학은 언제나 이성(理性)과 총명(聰明)을 신뢰한다. 루터는 이성(理性)을 ‘옛 마녀’라고 불렀다. 중세 시대의 유명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T.Aquinas)의 <신학대전>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철학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다. 복음주의자는 학식을 믿지 않는다. 주의 깊게 살펴볼 뿐이다. 어떤 사람이 위대한 학자라고 해서 무릎 꿇지 않는다. 위대한 성경학자라 할지라도 불신자일 수 있다. 복음적인 사람들은 학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인간의 이성이고 사변(思辨)이고 철학이지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아닌 것이다. 복음주의자는 성령의 자유를 믿는다. 복장이나 주교관(主敎冠) 등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건물이나 예배당 꾸미는 것에 단순하다. 복음주의자들의 관심은 거듭나는 것,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들을 강조한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고백한다.
복음주의자는 경건하다. 기도하는 사람이다. 복음적인 사람은 언제나 성령의 기름 부어주심을 고대한다. 성경을 오직 유일하고 충만한 권위라고 믿는다. 복음주의자는 성경과 배치되는 것은 그 무엇도 믿지 않는다. 구원의 유일한 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해 주심을 믿는다. 이는 하나님의 선언이시며 선물이다. 칭의(稱義)는 전적으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는다. 나도 형언할 수 없는 크신 은혜로 구원받은 자가 되었다.
김용관 장로
<광주신안교회·한국장로문인협회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