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자유화 촉진, 생의 마지막으로 사역 참여하길 기도”
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북한선교위원회 서기의 한 사람으로 1971년 6월 25일 북한자유화 촉진예배에 참석했었다. 또한 1993년부터 사단법인 한아봉사회 사무총장으로 사회주의 문화권인 여러 나라에서 10년간 선교사역을 진행해 왔다. 주님과 전국교회가 허락하신다면, 생의 마지막으로 이 사역에 시동을 거는 일에 참여하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총회 벽에 붙어있는 글을 보았다. 누가 지은 것인지는 모르나 그가 소망을 품고 적어 내려간 한 자, 한 자가 내 가슴에 새겨지듯 남았다. 나 또한 이런 총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살아있는 총회로 부흥하는 일은 남은 이들의 몫이다.
이런 총회가 되게 하여 주소서
말씀이 있으면서 / 행동이 있는 총회/ 사랑이 있으면서 / 순교가 있는 총회/ 모임이 있으면서 / 역사가 있는 총회 / 기도가 있으면서 / 능력이 있는 총회 / 감사가 있으면서 / 찬송이 있는 총회로/ 연약한 자들에게 / 힘이 되게 하시고 / 실패한 자들에겐 / 희망이 되게 하사/ 살아있는 총회로 / 부흥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교회답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30여 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이례적으로 총회의 여러 부서를 돌아다니며 다양한 분야의 사역을 경험한 나는, 후회되는 일은 없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쉽다거나 후회가 된다는 표현보다 “불충의 마음이 든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듣는 사람들은 그것을 겸손의 표현으로 여길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조금도 거짓이 섞이지 않은 내 솔직한 심정이다.
나에게 ‘진정한 이웃사랑이 있었는가’ 물으면, 나는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사랑으로 주변 사람들을 대하며 모두를 소중히 여겼는가’ 물으면, 나는 그저 부끄러움에 가슴이 뛸 뿐이다. 모두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했고,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한 사람을 향한 진실한 사랑보다는 기독교인의 책임과 의무로 그 앞에 설 때가 많았음을 고백한다. 특히 여러 사역을 이끌어 나가는 입장에서 사랑을 전하는 일이 때로 업무의 일부가 된 적이 있었음도 고백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있어서 더욱 그러했다. 삶의 현장은 우리에게 다양한 역할들을 요구한다. 때로는 교회에서 조차 하나님의 일이라는 미명 하에 세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기준을 제시하고 그것에 맞출 것을 암묵적으로 강압하기도 한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몰라서 끌려가기도 하고, 아닌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좇아가게도 된다. 그래서 우리는 바쁜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며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묻기를 멈추는 순간 내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착각하고, 내 기쁨을 하나님의 기쁨으로 오해하며 살게 되는 실수를, 죄를 피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묻는다. ‘하나님의 교회답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고 있는가?’
내게 남은 일
회고록을 준비하는 중에 생각지도 않은 특별한 선물을 받았다. 제 100회 총회를 맞아 총회에서는 각 분야에서 오랫동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한 총회의 일꾼들을 선정 해 공로 표창패를 수여했는데, 내가 사회봉사 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것이다. 많은 이들이 기뻐하며 축하해 주었다. 가까운 이들은 내게 상 받을 자격이 있다는 위로의 말도 해 주었다. 하지만 나는 어느 한 순간도 그 상이 내게 온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 적이 없다. 그것은 그냥 은혜였다. 뜻도 모르면서 찬송가를 흥얼거리게 하셨던, 전쟁터로 찾아오셔서 세례를 주셨던, 때마다 갈 길을 보여 주시고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게 하셨던 하나님의 또 한 번의 은혜, 이 자리를 빌어 부족한 종을 끝까지 보듬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앞으로의 삶도 주의 은혜 안에서 날마다 감사하며 살아가기를 소망한다.<끝>
※그동안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다음호부터는 본지 발행인 박래창 장로의 ‘행복한 선택 박래창 장로의 인생 이야기’가 연재됩니다
– 편집자주-
정봉덕 장로
<염천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