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로애락(喜怒哀樂)이 교차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때로는 행복감에 젖고 또 때로는 비극을 만나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하기도 한다. 불구하고 인생은 살 만하다는 생각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는 끝없는 광야 길을 헤매는 절망의 존재이다. 질병을 앓고 있거나 회복 불능의 병도 만난다. 순풍에 돛을 단 듯했는데 어느 순간에 모든 것을 삼킬 듯 태풍이 몰아닥친다. 평생 행복할 줄 알았던 인생의 행로(行路)에 폭풍우가 불어 닥치고, 먹구름이 일고, 모든 것을 삼킬 듯한 폭풍우가 오기도 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나약한 존재다. 신앙이 필요한 존재이다.
어떤 사람은 인간은 도덕적으로 살면 된다고 한다. 종교는 도덕과는 차이가 있다. 도덕은 가치와 행동의 원칙을 추구한다. 철학과 관계가 있다. 종교는 하나님을 찾으며 인간의 근본과 본질을 추구한다. 천상의 세계, 영적인 특성을 다룬다. 철학은 지적(知的)인 상태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철학자는 분석가이다. 개념을 만들어 내지만 자신은 그 안에 빠지지 않는다. 신앙은 전인격적(全人格的)이다. 인본주의는 결코 해답이 아니다. 인본주의는 모든 것이 가능성과 우연의 문제라고 한다. 그러나 자신의 인생 문제에 대하여는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한다.
찰스 다윈(C Darwin)은 역사를 바꾼 진화론자이다. 그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예수님께 대한 믿음에 등을 돌렸다. 순수 과학 연구에 삶을 바쳤다. 인간의 모든 어려움에 대한 해답은 과학에서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생애(生涯) 마지막에 그는 자신이 시, 음악, 아름다운 풍경 등을 느끼고 음미하는 능력조차 잃어버렸음을 깨달았다. 이것이 인본주의적 인간의 숙명이고 한계이다. 삶의 족쇄이고 능력의 제한구역이다. 진화론 연구로 과학자로서의 영광과 명성을 한껏 누렸던 다윈이 그 연구 대상을 누리고 감상하는 능력은 잃어버린 것이다. 결국 그의 영혼은 시들고 오그라들어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AD 5세기 어거스틴은 위대한 철학자이고 신학자다. 그는 방황이 끝난 뒤에 고백했다. 처음에는 철학을 통해 진리에 이르려고 했다. 철학자로 있는 동안 부도덕했다. 여인과 동거하고 있었다. 사생아도 낳았다. 실제로 그는 광야(曠野, Widerness, Desert) 속에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 “우리 영혼은 당신 안에서 안식(安息,Rest, Repose)을 찾을 때까지 결코 쉼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는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찾았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
돈 쥬앙(Don Juan, 354~385, 스페인의 방탕아)은 수많은 사랑을 경험했다. 후일 그의 고백이다. “사랑과 꽃의 열매는 사라져 버리고/ 벌레와 악종과 슬픔만이 내게 남아 있네.”
인생은 누구에게나 힘겨운 항해일 수 있다. 안팎에서 폭풍이 불어오기도 한다. 성경은 “너는 광야요 황무지이며 마른 땅이고 극빈자다”라고 한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역사(歷史)가 알렉산더 대왕이라고 부르는 영웅을, 다니엘은 ‘한 숫염소’라고 부른다. 절대자 앞에서는 영웅도 한낱 먼지 같은 존재이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3:8) 성령의 임재와 능력은 우리의 분석력을 벗어난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靈)이다. 사람의 본질을 변화시킨다. 관점, 감정, 이해, 성향, 갈망, 소망, 기대… 모두가 새롭게 된다. 성령 안에서 삶의 굶주림과 목마름이 비로소 만족을 얻는다. 목적이 있는 삶을 깨닫게 된다. 성령이 충만한 인생 길은 성령님과 동행하는 길이다. 행복하고 기쁘고 즐거운 소망의 길이다. 내가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
김용관 장로
<광주신안교회·한국장로문인협회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