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가 낳은 유명한 사상가 토마스 카알라일은 3권으로 이루어진 ‘프랑스 혁명’을 저술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결혼하고 1834년에 런던으로 이주하였으나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한 채 어렵게 살았다. 그는 성격이 무척 까다롭고 화를 잘 내는 편이라 부부싸움이 잦았다.
카알라일은 재능이 많은 사람이었으나 세상은 그를 알아주지 않았다. 그의 비범함을 인정해 준 사람은 철학자 에머슨이나 존 스튜어드 밀 정도였다. 카알라일은 원하던 대학의 교수 자리를 얻는데 실패하자, 낙심한 마음을 달래면서 고집스럽게 ‘프랑스 혁명’이라는 책을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5개월 동안 집필한 끝에 제1권을 완성하고, 그동안 연구 자료를 제공해 주었던 친구 밀에게 읽어보라고 원고를 빌려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밀은 창백한 얼굴로 카알라일을 찾아와 그 원고가 없어졌다는 절망적인 말을 하였다. 그의 집 가정부가 모르고 원고를 벽난로 불쏘시개로 태워버렸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카알라일은 대단히 상심하였다. 그러나 그는 밀에게 화를 내지 않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는 카알라일의 평소의 성격으로 볼 때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친구 밀이나 그 하녀가 내게 얼마나 미안해할까? 그들의 마음에는 이 일로 말할 수 없는 번민과 아픔이 있을 텐데, 내가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모든 것이 신의 뜻이고 섭리이다.’
카알라일은 또 자신이 당했던 과거의 불행한 사건들에 비추어 볼 때 이 사건은 또 하나의 불운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분노하거나 그리 크게 놀랄 일도 못 된다는 것이었다. 살아오면서 고생을 많이 하고 원하는 대로 인생이 풀리지 않던 그는, 작은 일에는 참을성이 없었으나 오히려 큰 시련 앞에서는 대범할 수 있는 체질이 되었다.
그는 시름에서 벗어나 다시 원고에 집중하였다. 드디어 1837년 초에 ‘프랑스 혁명’을 완성하였고, 그는 유럽을 대표하는 사상가의 반열에 이름을 남겼다. 카알라일이 남긴 말 중에 “길을 가다가 돌이 나타나면 약자는 그것을 걸림돌이라고 하고 강자는 그것을 디딤돌이라고 한다”는 말은 마음 깊이 새겨둘 만하다. 이 말을 직역하면 이렇다. “약자의 길에서는 장애물이었던 화강암 덩어리가 강자의 길에서는 디딤돌이 된다.”
문성모 목사
<전 서울장신대 총장•한국찬송가개발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