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래창의 인생 – 기도 후원자들이 만들어준 큰 언덕 (2)
“목사라는 이유로 아버지 인민군에 목숨 잃어”
우리 집은 대대로 풍족했다. 할아버지께서는 서울 유학으로 배재학당을 다녀 일찍이 개명한 분이셨다. 구레나룻에 신사복을 차려입고 단장을 짚은 채 남산에서 여러 친구분들과 함께 찍은 할아버지의 사진이 남아 있는데 지금 봐도 여간 멋쟁이가 아니시다.
서양 문물의 영향을 접한 할아버지는 기독교를 일찍 받아들였다. 종교로 믿으셨는지 신학문으로 하셨는지 알 수는 없지만 1930년대 우리 마을에 구세군 교회인 물우리교회를 세우셨다. 외아들이었던 아버지(고 박천수 사관)는 예수 믿는 처녀였던 어머니(고 김근녀 여사)와 결혼했고, 부부가 함께 서울 정동에 있는 구세군사관학교로 유학을 했다. 할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외국으로 보내고 싶어하셨으나 외아들이라 어쩔 수 없이 서울로 유학을 보내셨다고 한다. 아들뿐 아니라 갓 시집 온 며느리까지 두 사람을 같이 공부하도록 서울로 보냈다는 것은 지금 봐도 신기한 일이다. 할아버지께서 보통 깨인 분이 아니셨나보다.
1935년 졸업한 뒤 아버지는 구세군사관(목사)이 되셨다. 그때 함께 유학했던 마을의 또래 청년 양풍언 사관은 후에 구세군사관학교 교장까지 지냈다. 부모님 사진을 보면, 유난히 키가 크고 건장한 아버지 곁에 하얀 저고리에 까만 반치마를 받쳐 입고 굽 높은 구두를 신은 어머니가 서 계시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신식 부부였을 것이다.
졸업 후 부모님께서는 경북 상주 영문(교회)에서 첫 목회를 하셨다. 박해가 점점 심해지던 일제 식민통치 말기였던 당시, 동네에서 문제가 생기면 사람들이 할아버지를 찾아와 의논을 했다. 일본어가 유창하신 할아버지가 중재를 해주시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아버지도 일본어는 물론 영어도 가능해서 미국 선교사들과 교류하며 가까이 지내셨다. 어머니는 동네 여성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간단한 위생법 같은 것도 가르치며 농민계몽운동에 늘 바쁘셨다.
그렇게 동네에서 명문가로 이름이 높던 집안은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서 점차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일제 말기에 일본의 강권으로 교단 차원에서 신사참배가 강요되자 아버지는 구세군교회를 떠나셔야 했다.
하지만 해방 후에는 대한청년단 활동에 열심이셨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어머니가 내 아래로 동생을 낳은 뒤 출산 후유증으로 돌아가셨고 동생도 곧 세상을 떠났다. 병이 몹시 위중했던 어머니께서 나를 안아보겠다고 두 팔을 벌리시자 무서워서 할머니 방으로 뛰어갔던 일이 어머니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다. 내가 네 살 때였다. 할머니는 연로하셨고 형과 나는 아직 어린데다 거두어야 할 큰 살림도 있어 아버지는 재혼을 하셨다. 하지만 내 기억에는 그때부터 집안에 활기가 사라졌다.
1945년 해방되던 해에 한 가지 또렷한 기억이 있다. 광복을 맞이해 우리나라 팔도강산이 온통 축제로 들떠 있던 때었다. 가는 곳마다 씨름판이 벌어지고 있었고 농악이 울리고 술판이 벌어졌다. 상으로 황소를 걸어놓고 씨름판이 벌어진 곳을 지나다 대한청년단 활동을 하시던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께서는 나를 알아보시곤 껴안아 노점 앞으로 데려가더니 먹고 싶은 것을 집으라고 하셨다.
나는 사과가 먹고 싶었는데 삶은 고구마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왜 그랬는지 아버지가 돈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일 년에 몇 번 맛보기 어려운 귀한 과일이었던 사과를 고르지 못했던 것이다. 일곱 살짜리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버지께서는 그런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얼른 사과를 손에 쥐어주셨다. 지금도 나를 안아 주셨된 아버지 가슴의 따뜻함과 사과를 사주시던 다정함이 생생하다. 그 사랑의 체온이 한평생 힘들 때마다 훈훈한 위로가 되었다.
그런 좋은 시절도 잠시, 내 나이 열두 살에 인생이 크게 바뀌었다. 6.25가 발발한 것이다. 1950년, 그해 할머니께서 돌아가셨고 곧이어 전쟁이 터졌다. 우리 마을 물우리는 지리산과 가까워 회문산을 중심으로 빨치산들의 거점이 됐다. 해방 직후부터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극심했는데 그 모습은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 그대로였다. 물우리는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9.28 수복 후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 패잔병들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해방 전에 일본군 노역에 끌려가셨던 아버지는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도리어 집에 계셨고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이 절정일 때 피해 다니다가 잡혀서 학살당하셨다. 면장, 경찰, 군인 가족들이 주로 인민군에 목숨을 잃었는데 우리 아버지께서도 목사라는 이유로 학살당하셨다.
하루아침에 ‘반동 가족’이 된 우리는 모든 재산을 몰수당했다. 인민군 패잔병이 물밀듯이 밀려 들어와 가구며 생활 집기는 물론 장롱과 속내복, 심지어 기운 양말까지 다 가져갔다. 여러 대의 소달구지로도 모자라 동네에서 동원된 지게꾼 행렬이 빨치산 사령부가 있는 회문리까지 길게 줄을 이었다. 그때 나는 밥그릇 숟가락까지 없어져 버린 텅 빈 집이 무서워 동산에 올라가 있었다. 멀어져 가는 소달구지와 짐꾼 행렬의 영상이 뇌리에 선명히 남은 채로 내 유복했던 유년 시절은 끝이 났다.
뜨거운 밥, 뜨거운 눈물
매일 밤낮으로 비행기 공습, 밀리고 밀리는 전투가 계속됐다. 호남지구 전투경찰, 화랑부대가 투입되어 낮에는 국군이 수복을 했지만 밤이 되면 다시 빨치산 세상이었다. 그때부터 대량학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73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생생하다. 공무원, 군인, 경찰들은 무차별로 죽어나갔다. 본인이 없으면 가족들이라도 끌어다 죽였다.
우리는 몇 달간 집안에 격리됐다. 우리만이 아니고 경찰 가족과 군인 가족들도 모두 ‘반동 가족’이라며 일반인과 접촉을 못하도록 격리시켰다. 빨치산들은 야간전투에 나가서 곡식과 옷가지, 그리고 소를 수십 마리씩 끌고 왔다. 날마다 빼앗아 온 소를 잡아 잔치를 벌였다. 고기는 인민군들이 먹고 동네 사람들도 내장이나 우족, 머릿고기를 얻어먹느라 온 동네 분위기가 시끌시끌했다. 우리 집은 예외였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한밤중에 친척 아주머니가 대문 안으로 슬그머니 고깃국 한 대접을 밀어 넣어주고 가곤 했을 뿐이었다.
슬프다거나 부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 감상은 사치였다. 시시각각 닥쳐오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한 생각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마을에서 군인과 경찰, 면장 가족 중 청년들은 모두 학살당했다. 열다섯, 열두 살이었던 우리 형제는 나이가 어려서 살아남았다. 한두 살만 많았어도 그때 죽었을 것이다.
박래창 장로
<소망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