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의 길] 십자가에서 주님은 보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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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살짜리 남자 아이에게는 백혈병이 걸린 여섯 살 난 여동생이 있었다. 수혈을 받아야 하는 여동생은 아무 피나 받을 수 없는 혈액형이었다. 그런데 검사결과 아이의 피는 여동생과 꼭 맞았다. 상황이 급박했다. 부모는 아이에게 물었다. 여동생에게 0.5리터의 피를 줄 수 있겠냐고. 이 피가 여동생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했다. 아이는 하룻밤만 생각할 기회를 달라고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이 남자 아이는 피를 여동생에게 주겠다고 했다. 간호사가 이 아이에게서 0.5리터의 피를 뽑아 여동생에게 주는 동안,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의사가 아이를 보러 왔을 때에야, 아이가 눈을 떴다. 그리고 의사에게 물었다. “제가 죽기까지 얼마나 남았죠?” 

존 오트버그의 <누더기 하나님>에 나온 이야기다. 아이는 피를 뽑아서 여동생에게 주면, 죽는 줄로 알았다. 아이가 하룻밤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한 까닭은, 자기가 여동생을 살리기 위해서 정말 죽을 수 있는가를 생각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주님에겐 하룻밤이 아니라 무수한 밤들이었을 거다. 인간의 성정을 지니신, 우리 주님에게 있었을 그 고뇌의 시간들. 당신을 보내신 하늘 아버지의 뜻은 분명하고, 당신이 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당신 스스로도 아셨지만 마지막 날 밤까지, 우리 주님은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간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고뇌가 깊었다. 우리 주님에게도 씨름의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 주님의 죽음은, ‘가벼운 죽음’이 아니라 ‘무거운 죽음’이기 때문이다. ‘전가’라고 하지 않는가? 내 잘못을, 또 그 죄에 대한 책임을 그에게 넘겨씌우는 것을. 구약 시대, 제사장이 짐승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을 짐승에게 전가했다. 속죄하는 짐승에게 덮어 씌우는 거다. 그렇게 속죄 제물이 된 짐승은 살이 찢겨졌고, 피를 쏟아냈다. 이 짐승들이 사람들이 자기에게 전가한 죄를 알까? 영문도 모른 채 제물이 되는 거다. 하지만, 갈보리에서 속죄를 이루신 우리 주님께서는 모르실 리가 없다. 우리 주님께 전가된 허물들. 하나님을 배신하고, 그에게서 빼앗고, 때리고, 살해하고, 거짓으로 공모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유린하고, 그를 절망으로 나락으로 빠지게 한 인간의 죄악들. 우리 주님께서 한두 사람의 잘못을 덮어쓰신 게 아니다. 저 골고다에서 주님을 조롱하고 야유를 퍼붓던 사람들의 허물만 덮어쓴 게 아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누구의 것까지 덮어쓰시는가? 바로 여기 있는 나, 나의 죄까지도. 그분이 덮어쓴 건, 동시대 인생들의 허물을 넘어서, 시공을 넘어 여기 있는 우리들의 것까지다. 

유월절 어린 양 되신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시공을 초월하는 우리 주님의 눈이 열렸다면, 우리 주님은 우리가 요즘 열심히 감추고 있는 이 자리에 있는 우리 자신의 죄까지도 순식간에 보셨을 거다. 주님 앞에 있는 이들이 저지른 짓뿐 아니라, 우리가 자행한 죄과와 앞으로 일어날 인류의 끔찍한 실상이 우리 주님께 보였을 거다.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셨던 육체적 고통 때문에 눈물짓곤 하지만, 정작 우리 주님을 고통스럽 게 했던 건 다른 데 있지 않았을까? 속죄제물이자 화목제물되신 우리 주님께서 보셨던, 우리 주님에게 전가된 무수한 인생의 죄악, 그 처참한 인생의 어둠과 끔찍한 역사야말로 우리 주님께 지옥! 더할 나위 없이 고통스러웠던 그 시간에, 이런 인류의 죄과를 뒤집어쓴, 우리 주님께선 이렇게 외치실 수밖에 없었던 거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우리 주님은 죽으셨다. 살리기 위해서 죽으셨다. 저는 이번에야 떠올렸다. 이천년 전,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께서 이미 저를 보고 계셨다는 것을. 제 분노와 제 추악함과 제 더러움과 제 속임수와 위선을, 그래서 그분에게 전가하지 않으면, 더는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없는 제 자신을, 우리 주님께서 이미 보고 계셨음을. 

강영롱 목사

<삼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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