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고아들의 벗, 사랑과 청빈의 성직자 황광은  목사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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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청빈과 경건의 사람 <4>  백조의 노래 ‘까치’ ①

어린이 위한 일, 고향 온 것같이 즐거워

사회사업… 있는 자의 것 없는 자에 나눔

사퇴 뜻 받아지지 않자 이사 후 사임 

생에 대한 미련보다 일에 대한 미련 커

내 사명은 따로 있어요. 어린이들을 위한 일을 해야 하오. 어린이들을 위한 일을 하면 고향에 온 것 같이 즐거워요. 앞으로 정말 하고 싶은 일은 아동복지회를 만들어 가난한 아이들에게 장난감도 주고… 노인들에게 무료로 안경을 만들어 주고… 참으로 할 일이 많아요.

사회사업은 내 돈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오. 아이디어가 있고 그것을 실천하려는 사람이 있을 때 돈은 모이게 되는 거요. 있는 자의 것을 없는 자에게 나눠 주도록 만드는 것이 사회사업이 아니겠소?

나는 내 생애에 직장을 찾아본 적이라고는 한 번도 없어요. 어느 직장에서 나를 필요로 할 때마다 그때그때 최선을 다했을 뿐이오. 그리고 돈을 생각해서 일해본 적은 없소. 그저 일을 하니까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주셨을 뿐이오.” 

병상에 누워 황 목사는 계속 교회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해 연말에 김창걸, 이도명 등 여러 장로님들과의 사이에 다음과 같은 대화를 주고 받았다.

“목사가 이렇게 오래 앓으면 덕이 못 되오. 목회 전담할 목사가 오면 이 교회는 발전이 될 소질이 많이 있어요. 교회는 나보다 더 좋은 후임을 찾도록 합시다. 나는 앞으로 내 갈 길을 가야겠소.”

“목사님, 우리 교회는 처음부터 각오를 하고 있었으니 목회는 그대로 하시면서 하시고 싶은 일은 나가서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래서 황 목사가 일차적으로 내놓았던 후임 문제, H 목사와 J 목사 문제는 더 거론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다가 해가 바뀐 1970년 3월에 도미할 비자가 나오자, 황 목사와 영암교회 당회 사이에는 또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갔다.

“나는 건강이 회복되는 대로 미국 유학을 갔다가 올 터이니, 나 때문에 교회 발전이 방해되거나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소.”

“우리 교회 목사님이 유학을 간다면 우리 교회의 자랑입니다. 어서 안심하고 다녀오십시오.”

“슬그머니 사임합시다”

그 해 5월, 약간 회복되는 듯 싶던 병세가 다시 기울어지는 것을 느꼈을 때, 그는 영암교회에 사표를 내면서 강경하게 사퇴할 뜻을 주장했다. 그에 대해서 교회의 뜻 역시 강경했다.

“목사가 병들었을 때 사표를 받는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아무 생각 마시고 안심하고 쉬십시오.”

황 목사는 더 주장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교회에서 내는 수고비를 덜 받겠다고 주장했으나 그 뜻이 받아질 리는 없었다. 그러다가 다시 입원하게 되었는데, 그 때 황 목사는 김 여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교회에서 참아 준다고 내가 이렇게 오래 병상에 누워 있다는 건 도의상 안 될 일이오. 그러니 이사부터 해 놓고 슬그머니 사직하도록 해 봅시다.”

병원에 입원하고 나서는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내 나이 전성기에 이렇게 앓는 것은 하나님께서 앞으로 내게 어떻게 하실 것인가, 지금 그 뜻을 찾는 중이에요. 하나님께서는 내 힘으로 끊지 못하던 일을 다 정리해 주시는 것 같아요.

여보, 요새 나는 강력하게 기도할 수 없어요. 엎드리면 숨이 차거든. 그래서 반듯이 누워서 기도하곤 해요. 나는 모든 각오가 되어 있어요. 지금이라도 나으면 당장 일할 수 있는 각오도 되어 있고, 내 병이 오래오래 걸린다면 또 거기에 대한 각오도 되어 있어요.”

그 무렵 김유선 여사는 안타까운 나머지 자식들에게 “시간이 날 때마다 아버지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라. 누구보다도 우리 식구들이 기도해야 한다”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황 목사는 어느 날 김 여사에게 말했다.

“여보, 나는 어린 자식들의 기도까지 들어서 내 생을 연장하고 싶지는 않소. 내가 좀더 일을 했으면 하는 생각에서 병이 낫기를 바라고는 있지만 말이오.”

그는 죽음이 가까워 오던 그 시간에도 생에 대한 미련보다 일에 대한 미련이 컸었던 것이다. 결국 그에게 아쉬움이 있었다면 더 많은 사람을 더 많이 사랑하지 못한 사실이었다. 그는 병상에서 여러 번 이런 말을 중얼거린 것이다.

“내가 과거 10년 이상 사랑에 대해 설교했었지만, 과연 내가 누구를 진심으로 사랑했지?”

7월로 접어들면서 그의 병세는 악화될 대로 악화되었다. 삼복의 태양빛은 너무나 뜨거웠고, 그나마 그가 누워 있는 방은 양지바른 곳이라 도저히 그대로 여름을 날 수는 없었다.

형 태은 장로의 주선으로 우이동에 자리잡은 그린파크 호텔에서 열흘 동안 쉬게 되었다. 작곡가이며 황 목사의 조카사위인 박재훈 박사가 함께 동행하기로 했다.

그 무렵 황 목사는 대화를 많이 하고 나면 몹시 피곤을 느꼈기 때문에 교회 장로님들에게까지도 그의 거처를 알리지 않고 조용하게 지내게 했다. 사람을 무척 좋아하던 그는 무척 쓸쓸함을 느끼는 듯했다. 

그래서인가 그는 산 속에서 지저귀는 까치를 바라보며 동요 한 편을 썼다. 결국 그것이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고 만 것이다.

동요 ‘까치’와 ‘참 하나님의 사람 황광은 목사’ (박재훈)

캐나다에 거주하고 있는 박 박사는 1980년, 필자의 청에 따라 ‘참 하나님의 사람 황광은 목사’라는 제목 밑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보내 주었다. 전반부는 황 목사에 대한 추억이요. 후반부는 열흘 동안 함께 지내면서 보고 느낀 일을 적은 것이다. 중복되는 대목도 있겠으나 고인과 가장 절친했던 사람 가운데 한 분이었기에 여기 전문을 옮겨 싣는다.

 

그 분이 지금까지 살아 계셨으면 이 혼탁한 한국 교계를 위해서 보다 많은 공헌을 하셨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사실 그분은 자기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요, 또 무엇이 자기 손에 들어온대도 그 물건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곧 주고마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황 목사님 가신 지 어언 10년 세월도 많이 변하고 인심도 많이 변했건만 때로 그분을 생각할 때면 칠흑같은 어두움으로 말미암아 숨을 쉴 수 없는 광야에서 한 줄기 하늘의 빛을 보는 것 같아 내 영혼의 기쁨이 되어 주곤 한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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