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희 선교사] 얼굴도 마음도 예쁜 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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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생이 된 나는 방학이 되면 원주에 내려가 작은아버지의 병원 일을 돕기도 했다. 요즘 같으면 의대생이 병원 일을 돕는 것은 있을 수 없지만, 그 시절만 해도 나라에 질서가 잡히지 않을 때라 뭐라 할 사람도 없었다. 심지어 작은아버지를 대신해 왕진까지 다녔으니 무슨 말을 더하랴. 그것은 훗날 내가 왕진과 이동진료에 익숙한 의사가 되도록 한 기초 연습이었는지도 모른다.

봉사 활동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연세대학교에 입학한 후 의대생들의 봉사 동아리인 ‘VV클럽’에 가입했다. 세월이 흘러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VV’는 독일어로 ‘생명을 경외한다’는 뜻이었던 것 같다. 그 클럽은 ‘아프리카의 성자’로 알려진 슈바이처 박사의 뜻을 본받자는 취지 아래 의료봉사를 다니는 모임이었다. 나는 그 클럽을 통해 슈바이처 박사의 전기를 접하게 되었고 그의 삶에 깊이 매료되었다.

클럽 회원 중에 동기생 한 명이 있었다(그는 훗날 연세의료원의 부총장이 되었다). 졸업이 임박할 무렵, 하루는 그 친구와 내가 서울역 근처의 빵집에서 만났다. 당시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이 지금의 서울역 건너편에 있었다.

친구가 내게 물었다.

“원희, 너는 졸업하면 뭐 할래?”

“내 꿈은 무의촌에서 진료하는 거야.”

내 말을 가만히 듣던 그가 다시 물었다.

“너, 여자 친구는 있냐?”

“내가 공부하고 집안일 하느라 여자 사귈 시간이 어디 있었냐? 네가 소개라도 해줄 거야?”

그는 VV클럽의 회원인 최화순 간호사를 내게 소개했다. 그녀는 이미 1년 전에 연세대학교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고아원 봉사에 열심이라는 예쁜 간호사에게 내 마음은 금세 기울어졌다.

내가 전주와 광주에서 수련의 생활을 하느라 데이트라고 할 것도 없고, 연애도 변변히 못했다. 일에 바빴던 우리는 가끔 편지를 주고 받았다. 나는 한 달에서 40일에 한 번씩 겨우 썼다. 한번은 아내가 ‘이번 내 생일에도 아무 소식 없으면 관계를 끊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며칠 후 선물과 함께 소설책 분량의 긴 편지가 와서 매우 기뻤다고 한다.

연애할 당시 아내는 세브란스 병원 수술방 간호사였는데 하루는 나에게 자신의 진로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장성 탄광 의료원 수술방 수간호사가 필요하대요. 가도 돼요?” “나 같으면 가고 싶네요.”

그래서 그녀는 장성 탄광 의료원 수술방 책임자로 갔다. 내가 한 번은 열 시간 넘게 걸려서 찾아가기도 했고, 아내도 내가 있는 전주로 한 번 왔다. 나를 찾아온 아내를 보고, 그때서야 간호사들을 비롯해 병원 사람들이 내가 연애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서로를 믿음으로 기다린 우리는 내가 레지던트 1년 차인 1962년 12월 12일 12시에 결혼하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계획보다 2시간 앞 당겨진 10시에 조선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내가 의과대학에 다니던 195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심각할 정도로 무의촌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면 전문의가 되기 위한 인턴과 레지던트 수련의 과정을 포기하고 바로 무의촌 진료를 나갈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졸업을 앞두니 군대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인턴 과정이 1년, 레지던트 과정이 4년 해서 모두 5년간 수련의 과정을 거친 다음에는 또 군의관이 되어 군 복무를 해야 한다. 하지만 수련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곧바로 일반 사병으로 군대를 가야 한다.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지 결정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다. 마음으로는 바로 무의촌으로 가고 싶었지만 그러면 수련의 기간에 못지않은 시간을 군대에서 사병으로 보내야 했다.

고민 끝에 대학생 시절에 출석하던 아현감리교회를 찾아갔다. 감독으로 은퇴하시고 2010년에 소천하신 김지길 목사님이 당시 그 교회에 계셨다. 마침 교회 문 앞에서 김 목사님을 만났다. 나는 목사님 께 내 소개를 하고 고민을 말씀드렸다. 목사님은 오래 기다리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자네 두 사람의 나무꾼 이야기 아나? 두 사람이 나무를 하러 가기로 했는데 전날 한 사람은 톱이랑 도끼를 잘 다듬고 갈아둔 반면, 다른 사람은 친구들과 만나 늦게까지 놀다가 아무 준비 없이 다음 날을 맞이했지. ‘도끼나 톱은 늘 쓰던 거니까 괜찮겠지’ 하고 생각한 거야. 그런데 전날 놀지 않고 톱과 도끼를 갈아둔 사람은 일을 쉽게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은 상대적으로 일하기 힘들고 고생만 한 거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나?”

나는 그 자리에서 “고맙습니다!” 하면서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전문의 훈련을 받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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