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연세대학교를 졸업한 나는 전주 예수병원에서 수련의 생활을 시작했다. 서울을 떠나 전주까지 간 데는 당시 학장이셨던 김명선 교수님의 영향이 컸다. 신앙적으로도 모범이 되는 분이었는데, 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자네들은 졸업하면 모교에 있지 말고 흩어져!”
그때 졸업 동기생이 64명이었는데 다른 대학은 100명이 졸업하는 곳도 있어서 가급적 흩어지는 것이 향후 학교 발전을 위해 더 좋다는 의견이셨다.
인턴 생활은 지독했다. 새벽 6시면 회진을 하는데 회진 준비는 인턴의 몫이었다. 내가 봐야 할 입원 환자가 대략 40명, 낮에는 수술실에도 불려가고 응급실 당직도 서야 했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수술 도중에 졸다가 벼락 같은 야단을 듣기도 했다.
일과가 끝나면 새로 들어온 입원 환자의 병력을 조사하고 기록하고, 무슨 병 같다 싶으면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엑스레이도 찍고 검사도 해야 했다. 그런 다음 구환(久患), 즉 입원한 지 오래된 환자들의 상태도 어떤지 다 기록해야 했다.
그렇게 하고 나면 보통 새벽 두세 시가 된다. 새벽 회진을 준비하려면 늦어도 다섯 시 반에는 일어나야 하니, 기껏해야 하루에 두세 시간밖에 못 자는 생활이 반복되었다. 지금이야 병동마다 컴퓨터만 켜면 엑스레이와 검사 기록을 다 볼 수 있지만 그때는 일일이 필름 찾아오고 검사 결과를 뒤져서 준비해야 하니 새벽마다 발에 불이 났다.
인턴 시절은 고생스러웠지만 한편으로 많은 것을 배운 시간이었다. 내가 그 시절에 배운 의술과 현장 경험 못지않게 소중한 경험은 따로 있었다. 바로 예수병원 원장이던 씰 박사(David John Seel, M.D.)와 광주기독병원 원장을 역임한 커딩턴 박사(Herbert Augustus Codington, M.D.)와 같은 헌신적이고 훌륭한 의료 선교사로부터 직접 배우며, 그들의 신앙과 봉사 정신을 온몸으로 체득한 것이다. 이토록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일한 경험은 의료 선교사가 된 나에게는 큰 축복이며 은혜였다.
예수병원 원장이던 씰 박사는 한국 이름 ‘설대위’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데, 신앙 인품과 환자에 대한 사랑이 그렇게 크고 깊고 훌륭할 수가 없었다.
1964년 7월, 예수병원에서 레지던트로 일할 때였다. 하루는 전북 임실에 사는 30대 부인이 농사일을 하던 중 갑자기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 왔다. 원인은 간경화였다. 한 달간의 입원 치료 끝에 완치는 되었지만 가난한 시골 사람으로서는 막대한 병원비가 걱정이었다. 그 사실을 안 설대위 원장은 병원비를 받지 않고 퇴원시켰다.
환자로서는 놀랍고 감동적인 배려가 아닐 수 없었지만 병원으로서는 난감한 처사였다. 문제는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예수병원 의사들은 형편이 안 좋은 환자가 오면 은근히 설 원장이 몰랐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가 알면 또 병원비를 받지 않고 보낼 것이 분명했고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면 병원 운영에 지장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 2010년 4월에 이런 뉴스를 보았다. 1964년에 병원비를 내지 못하고 쩔쩔매던 바로 그 환자가 건강하게 살아서, 설대위 원장과 예수병원에 진 사랑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고 싶다며 아들과 상의하여 예수병원에 100만 원을 기탁했다는 내용이었다. ‘46년 만의 보은(報恩)’ 소식은 나의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해주었고, 흐뭇한 마음이 들어 많이 행복했다.
나는 수련의가 되기 위해 공식적으로는 전주 예수병원 소속이 되었지만, 사실상 나의 첫 번째 수련 병원은 광주제중병원이 되었다. 당시 광주제중병원은 결핵 전문병원이었다. 예수병원과 광주제중병원에 의료 선교사들을 파송한 선교부에서는 광주제중병원을 종합병원(현 광주기독병원)으로 발전시키기로 하고, 자리를 잡을 때까지 전주 예수병원의 인턴과 레지던트 2년 차를 파송하던 무렵이었다. 그래서 인턴으로 내려간 나를 광주로 보낸 것이다. 나는 전주에서 짐을 풀 겨를도 없이 곧장 광주로 내려갔다. 그렇게 광주에는 1년에 한두 번, 한 번 가면 한 달 정도 있다 왔다.
광주에 내려간 덕분에, 그곳에서 사역하고 계시던 커딩턴 박사(한국 이름 고허번)까지 알게 된 것은 내게는 말로 다 못할 축복이었다. 내과의사였던 고허번 선교사는 1949년에 한국으로 왔으며, 전쟁의 화흔(火痕)이 여전했던 1951년에 광주에 와서 1974년까지 25년간 사역 했다.
그는 자칭 ‘광주 커씨’라고 말할 정도로 철저하게 한국에 뿌리 내린 사람이었다. 평생을 선교사로 헌신했으며, 결핵 환자의 재활 치료는 물론 윤락 여성 선도에도 앞장서 ‘광주의 성자(聖者)’로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