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순교자 길 앞장서서 나아간 대표 목사
예수 위해 목숨 아끼지 않아… 역사의 흔적 남겨
죽는 순간까지도 신앙의 절개를 꺾은 교회와 지도자들을 걱정하는 순교자의 애틋한 심정이 깃들어 있었다.
4월 21일 새벽 노모가 꿈을 꾸었다. 주 목사가 흰 옷을 입고 나타나 노모께 절을 하면서 “어머님, 저 왔습니다” 하더라는 것이었다. 오정모 사모는 이상한 예감이 들어 형무소로 갔다. 그날이 토요일이었다. 면회를 신청했으나 안 된다고 했다.
오정모 사모는 아는 간수를 만나 담대히 말했다. “우리 목사님, 별세하셨지요?” 그때 간수는 정색하면서 “어떻게 알았소” 하는 것이었다. 간수는 다시 말하기를, “놀랄 것 같아 말하지 않았는데 어쩌면 그렇게 담대할 수 있습니까?” 하고 존경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온갖 모진 고문과 회유에도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은 주기철 목사는 진달래 필 무렵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내 오정모 사모도 1947년 1월 27일 남편 주기철 목사의 뒤를 따라갔고, 큰아들 주영진 전도사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회하다가 6·25 전쟁 때 공산당에게 31세 젊은 나이에 순교했다.
주기철 목사는 피로 물든 우리나라 기독교 수난기에 십자가만 바라보고 가장 아프게 살다가 간 한국교회의 사도였다. 한국교회 순교자의 길을 앞장서서 나아간 목사의 대표자였다. 예수를 목숨보다 더 사랑한 제자였다.
그는 많은 일을 하지 못했다. 교회를 개척하거나 대형 교회를 만들지도 못했다. 그는 신학박사도 아니요, 총회장도 맡은 적이 없었다.
그는 순교자로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순수 신앙의 뿌리를 남겨 놓았다. 한국교회 역사에서 주기철 목사를 높이 추앙하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고 예수를 위해서는 목숨도 아끼지 않은 새로운 신앙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어디를 가든지 주님만 섬기는 주기철 목사는 한국교회에서 가장 뚜렷한 역사의 흔적을 남겼다.
한국교회는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를 냈다. 그 이유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많아서가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오직 하나님을 믿고 오직 예수를 사랑하는 순진한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기철 목사는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고, 1968년 국립묘지에 묘지가 조성되었으며, 1983년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정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2015년 12월 25일 성탄절 특집으로 KBS1 방송에서 밤 10시에 ‘一死覺悟, 주기철’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그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경남 창원시 진해구 흥천동에 있는 주기철 목사 기념관이 소개되었다. 2016년 3월 1일 삼일절 기념 특집방송으로 재방송되었으며, 추가로 해당 다큐멘터리가 2016년 3월 17일에 영화화되어 개봉했다.
주기철 목사가 순교의 길로 갈 수 있었던 그 신학과 신앙은 다음의 몇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말씀(성경)과 기도의 신학이었다. 주기철 목사의 생애는 철저히 성경과 기도 중심의 신학과 신앙으로 일관되었다. 그의 생은 성경과 기도에서 시작되었고, 성경과 기도로 살았고, 성경과 기도로 끝맺었다. 성경 없이는 그의 생을 점검할 수 없을 정도로 성경 말씀은 주기철 목사 삶의 근본이 되었다. 성경 말씀에 철저하지 않았다면 그의 목회도, 순교도 있을 수 없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