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좌절의 바닥서 쉴 수 있는 기회 가져”
돈 벌게 되면 마음껏 헌금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 헌금할 수 있음에 늘 감사
구두닦이의 짧은 경험은 끝이 났다. 그 이후로는 다시 신문배달과 잡지팔이 일로 돌아가야 했지만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성격은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변했고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사고를 하게 됐다.
그전까지는 장래 희망을 생각할 때 막연하게나마 법관, 교사 등 안정되고 고상한 직업만 떠올렸던 나였지만, 이때 한번 자기 자신을 새롭게 발견한 경험은 훗날 아무 연고도 없고 배운 적도 없는 사업에 호기롭게 뛰어드는 밑천이 됐다.
요즘 뉴스를 보면 많은 젊은이들이 비싼 등록금과 물가로 힘들어 하고 있다.
하나밖에 없는 출구로 몰려 과잉 경쟁으로 지쳐가고 있다. 공부할 시간도 없이 아르바이트에 쫓기고, 대출받은 학자금 융자를 갚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되는 대학생들이 많다고 한다.
심지어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여 목숨을 끊는 일까지 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모른다.
그런 젊은이가 내 앞에 있다면 두 손을 꼭 붙잡고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오히려 어려운 시련을 극복해보는 경험이 참 소중한 기회일 수도 있다. 아무에게나 어려운 시련이 오는 것이 아니다. 한번 부딪쳐볼 기회로 삼아보자. 시련을 극복해본 사람만이 높은 경지의 경륜과 여유를 가질 수 있다. 그런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다.”
발버둥 쳐도 안 되는 일
고등학교에 진학할 즈음, 외삼촌댁도 형편이 어려워졌다. 형님과 나는 각자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가며 학교를 다녀야 했다. 나는 다방과 당구장 관리직으로 일하게 됐다. 인천에서 산부인과 병원을 운영하며 다방과 당구장까지 경영하는 분을 만난 덕분이었다. 당구장 구석방에서 숙직하면서 청소며 이런저런 잡일을 하는 생활은 대학생이 될 때까지 계속됐다. 그 3년여 동안 두 다리 뻗고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었다. 형과는 떨어져 살 수밖에 없었는데 각자의 앞가림을 하는 것만도 벅차서 따뜻한 밥 한 번 같이 먹을 기회도 거의 없었다.
그런 상황이라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당시는 수도권에 종합대학교가 10개쯤 있었고 막 시작한 단과대학들이 몇 개 있었다. 학교 성적표와 입학원서를 내면 대부분 합격통지서가 나올 정도로 대학 입학이 쉬운 시절이었다. 문제는 입학 등록금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학 갈 형편은 안 됐다. 입학원서를 넣는 것조차도 포기했다. 그런데 D 대학교 야간대학 합격증이 날아왔다. 알아보니 한 친구가 대신 원서를 내고 첫 학기 등록금까지 내준 것이었다. 죽고만 싶다는 내 일기장을 본 모양이었다. 잊을 수 없는 고등학교 친구 류근춘이다.
그렇게 해서 꿈만 같은 대학 생활이 시작됐다. ‘장님이 눈을 뜬 기적이 내게도 왔구나’하고 생각했다. 희망도 생겼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장학금을 받으려 잠도 못 자고 공부했지만 행복했다. 그러나 언제라도 부서질 듯 불안한 행복일 뿐이었다. 학기말 시험이 끝나고 친구들과 함께 공원을 산책하다가 피를 토하며 쓰러질 때까지 잠깐 동안 누릴 수 있었던 행복이었다.
갑자기 하늘이 노래지더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친구들이 쓰러진 나를 업고 병원으로 왔다고 했다. 만성 영양실조 상태로 장학금을 타보겠다고 기말고사 때 며칠간 밤샘한 것이 화근이었다.
“결핵입니다.” 의사의 한마디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렇게 발버둥 쳤는데 이렇게 끝나는구나.’
그렇게 학업을 중단했다. 학교를 그만두자 인생도 그 자리에 멈추어선 것 같았다. 발아래 딛고 있는 땅이 얼마나 깊은지 한 걸음을 뗄 때마다 현기증이 났다.
친구들의 주선으로 인천의 작은 암자인 ‘약사암’에 방을 얻어 요양을 시작했다. 그 절 안에는 부잣집 별장도 있었고 고시 공부를 위해, 또는 소설을 쓰기 위해 왔다는 대학생들도 있었다. 나는 친구들이 쌀과 반찬, 양은 밥솥을 가져다주어 밥을 해 먹으며 요양을 했다. 형편이 넉넉한 대학생들, 보살 할머니, 고급 오토바이를 타고 별장에 오는 젊은 부부들과도 사귀었고 맛있는 음식을 얻어먹기도 했다.
그곳에서의 반 년은 모처럼의 휴식기간이 됐다. 책도 보고 산책도 하며 자연 속에서 여유를 찾았다. 몸부림치며 허우적거리다 모처럼의 휴식을 얻은 것이다. 절망과 좌절의 바닥에서 오히려 쉼을 얻었다. 학교를 중퇴하고 폐병에 걸린 것이 절망의 낭떠러지가 아님을 깨달았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다시 살아났다. 절에서 지내는 처지였지만 주일이면 작은 산을 넘어가 부평역 근처의 교회에서 마음을 다해 간절히 기도했다.
헌금 시간에 잠자리채 같은 헌금 주머니가 앞을 지나갈 때면 헌금을 못해서 부끄러웠다. 그래서 언젠가 돈을 벌게 되면 마음껏 헌금할 수 있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때문인지 요즘 교회에서도 주일 헌금 주머니가 눈앞을 지나갈 때면 그때 헌금을 못해 부끄러웠던 일이 생각난다. 헌금할 수 있는 처지가 된 것이 감사하고 감사하다. 주변 사람들에게 듣기로 폐병은 잘 먹고 잘 쉬면 낫는 병이라고 했다. “약 잘 챙겨먹고 쉬면 얼마든지 고칠 수 있다”는 위로에 기운을 냈다. 유일한 치료는 서울역 앞 세브란스병원에서 무상으로 나눠 줬던 폐결핵 약을 먹는 것이었다. 매일 손가락 마디만큼 굵은 약을 한주먹씩 아침저녁으로 삼키는 것은 참으로 힘들었다. 약 이름도 지금까지 잊지 않았다. ‘파스’, ‘나이드라지드’라는 두 가지 하얀색 정제로, 국제 구호단체가 무상으로 제공해 준 폐결핵 치료약이었다고 기억한다. 가장 아픈 시절에 쓰디쓴 마음으로 삼켰던 그 알약들의 이름은 마치 폐결핵의 흔적이 폐에 남아있듯,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
바닥에 떨어졌을 때는 쉬어 가자
친구들은 자기들도 넉넉지 않은 형편이면서 나를 보러 올 때마다 먹을거리를 가져다주었다. 그럼에도 워낙 영양실조가 심해 차도가 없었다. 그러던 중 한 친구가 “공군에 가면 끼니마다 콩나물국에 돼지비계가 둥둥 뜬다더라”고 말하는데 귀가 번쩍 뜨였다.
마침 요양 반 년여 만에 육군 소집영장이 나와 있었다. 그때는 병원 진단서를 가지고 징집을 연기하는 제도가 없었다. 육군에 가면 배고픔과 심한 중노동, 훈련으로 죽을 수도 있다고 해서 걱정하던 차였다. 나는 주저 없이 공군에 지원했다.
당시에도 군대를 기피하는 사람이 많았고 ‘빽’(연출)을 쓰면 면제받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기피는커녕 ‘어떻게든 공군에 들어가야만 산다’는 생각뿐이었다.
문제는 공군은 경쟁이 치열하다는 것이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역시나 ‘빽’이 상당히 작용한다는 소문이 있어서 내가 합격하기를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박래창 장로
<소망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