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Nehemiah)는 BC 5세기에 활동한 유대인 지도자이다. 포로로 잡혀가 페르시아(바사 제국) 아닥사스다 왕 때 고위직에 있었다. 왕의 허락을 받아 귀환,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있었다.(BC 444년경) 반대자들의 많은 방해를 받았다. 그의 목숨이 위기에 처했을 때 거짓 친구가 와서 도망가라고 말했다. “너는 선한 사람이다. 그러니 네가 하고 있는 일로 인하여 네 목숨을 위험하게 해서는 안 된다. 밤에 그들이 와서 너를 죽이리라.” 거짓된 친구는 느헤미야가 살 수 있는 방도를 제시했다. 느헤미야가 그 거짓 친구의 말을 들었다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 느헤미야는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말했다. “나 같은 자가 어찌 도망하며…”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은 영적(靈的)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영적인 생각과 이성적인 생각의 차이는 크다. 이성적 사고는 육신적인 차원, 땅의 차원에서만 생각한다.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적인 사고는 더 높은 수준에서 생각한다. 모든 사실을 다 감안한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단지 이성(理性)의 수준에서만 보았다. 나사렛 시골 사람, 목수로만 보았다. 배운 적이 없는 사람으로만 보았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일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연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영적으로 생각하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속죄의 교리도, 거듭남의 교리도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입장에서 모든 것을 보아야 한다.
스펄전(C H Spurgeon, 1834~1892) 목사의 말이다. “진정 성도답게 살며 기도하고 평소에도 성도답게 행동하는 자들이 교회 모임에서는 갑자기 마귀가 될 수 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교회를 빛낸 위대한 성도들 중에는 고난과 환난을 겪은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거장들에게도 시련과 실수와 실패가 있었다.
사도 바울은 핍박이 계속되는 시대적 환경에 주눅이 들고 잘못된 일들에 불만이 있던 디모데에게 편지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종들이 박해당하는 것을 보면서 두려워할 수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 같은 일들을 기도와 묵상으로 이겨낼 수 있어야 한다. 묵상은 하나님의 속성, 존귀하심, 인자하심, 영광스러움, 엄위하심, 지고하신 사랑, 십자가 공로와 은혜 등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기도는 죄를 파괴하고 시련을 이겨내는 데 유용한 은혜와 수단이 되어 준다. 기도는 성령 안에서 해야 한다. 전체적인 생각이 일관되어야 한다. 진실해야 한다.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옵소서.”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밧세바에게서 태어난 솔로몬은 열 번째 왕자였다. 불구하고 그가 어떻게 다윗을 이어 왕이 될 수 있었을까? 많은 왕자들 가운데 솔로몬만이 야긴(Jachin, 하나님을 경배, 여호와께서 세우신다)과 보아스(Boaz, 하나님은 일하신다, 여호와의 능력으로)의 믿음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긴과 보아스는 솔로몬 성전 출입구의 좌우편에 세워진 두 놋기둥이다. 느부갓네살의 예루살렘 침공 때 파괴되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나도 영적으로 생각하는 믿음으로 인생의 어려움을 이겨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고 싶다.
김용관 장로
<광주신안교회·한국장로문인협회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