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시 40분이었다. 내무반 불침번이 옆에서 자는 사람을 의식하면서 조심스럽게 나를 깨웠다. 옷을 급하게 입고 단독군장으로 내무반 밖으로 나왔다. 1월 중순의 전방 날씨는 매섭다 못해 따가웠다. 비록 날씨는 매우 추웠지만 나라와 국민의 안위를 생각하면서 그리고 내가 가야할 길이기에 잽싼 걸음걸이로 외곽초소로 향했다. 세상은 온통 어둠에 휩싸였고, 보이는 것은 하늘에서 나를 반겨주듯 바라보는 총총한 별뿐이었다.
전 근무자와 교대를 하고 계속 주위를 살폈다. 방한복을 입었다고는 하지만 새벽이 오기 전의 혹한은 발에서부터 점점 온몸을 타고 올라왔다. 그때 내무반 막사 부근에서 어렴풋이 걸어오는 한 사람이 보였다.
바짝 긴장이 되었다. 상대는 점점 초소로 가까이 다가왔다. 10여 미터 가까이 왔을 때 보초수칙에 의하여 정상적으로 대응했다. 다가온 사람은 나보다 한 계급 낮은 박 일병이었다. 박 일병은 명찰 위에 녹색으로 된 ‘군종’이라는 표식을 붙이고 다니는 후배 전우였다. 그런데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주전자였다. “박 일병 어쩐 일인가?” “네 김 상병님, 수고하십니다. 다름이 아니라 날씨가 너무 추워서 몸 좀 녹이시라고 따뜻한 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하면서 컵에다 차를 따라 주었다. 향기가 그윽했다. 아마 칡차인 듯했다. 갑자기 어머니 같은 포근함이 느껴졌다. 이건 마음만 먹으면 산에 가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그런 흔한 칡이 아닌,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열애차(熱愛茶)였다.
지금도 가끔 그때 박 일병이 배달해 준 칡차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일 후 내가 변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주일날 교회에 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박 일병이 나에게 한 번도 교회에 가자고, 예수를 믿자고 하지는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박 일병이 믿는 예수가 믿고 싶어졌다. 나 같은 사람이 교회에 가도 괜찮은지 많이 망설이면서 군대 교회에 첫발을 내딛게 된 역사적인 순간이 되었다.
교회의 첫인상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솜이 내 몸을 감싸는 듯 포근했다. 추운 겨울이면 가끔 생각났던 박 일병이 왜 올해는 따뜻해진 봄날에 이렇게 떠오르는 것일까?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계속하면서 서리집사를 거쳐 안수집사가 되고 이렇게 한 교회의 장로까지 되었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요즘 코로나19 때문에 전도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지만 전도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소 실천하고 내가 모범이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108회기 총회 주제는 ‘주여! 치유하게 하소서’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면서도 그동안 많은 갈등과 위험 속에 처해 있어서 바로 내 앞밖에 볼 수 없었지만, 이제부터는 이웃을 위해 배려하고 봉사하는 마음을 가져서 서로가 따뜻한 정을 나눌 수 있다면 모든 것이 치유되고 마음이 형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처음 가졌던 신앙생활의 꽃, ‘믿음’을 하나님 오시는 그날까지 지속함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또 영광 받으실 줄 믿는 그런 마음만 간절히 가질 뿐이다.
김영래 장로
<전주노회 장로회장, 전주중부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