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청빈과 경건의 사람 <4> 마음의 거문고 ②
한국 교계•사회 큰 재목 잃은 것
신앙•애국심 청소년들에 큰 감명
믿음으로 화해•협동 몸소 실천
교회 분열 못 보고 합력에 온 힘
“괜찮아, 다 나았어!”
1970년 7월 15일, 그가 숨을 거둔 그 순간까지 주위 사람들에게 도리어 안심시키느라고 “괜찮아, 다 나았어”하며, 천사같이 웃는 얼굴과 환한 얼굴로 숨을 거두었다.
그 웃는 얼굴, 그 인자한 모습, 내 몸을 아낌없이 내어준 그 희생, 어진 모습이 그가 간 지 30년을 맞아가는 이 때도 더욱 뚜렷이 내 마음 속에 자리를 굳힌다.
그는 갔다. 한국 교계는 물론이려니와 사회에서도 큰 재목 하나를 잃은 것이다. 그가 작고한 뒤 간행된 그의 설교집 ‘성직자’ 서문에서 한경직 목사는 다음과 같이 그를 추모하고 있다.
– 황 목사님은 선천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은사가 많고, 또한 그의 깊은 신앙과 애국심에서 우러나오는 부르짖음은 실로 현대 한국의 청소년들에게 큰 감명을 준 것이다. 아깝게도 그는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셨으므로 우리는 다 같이 슬픔을 금할 수가 없다.
또한 황광은 목사와 절친했던 친구였던, 지금은 고인이 된 김동수 목사는 같은 ‘성직자’ 머리글에서 황 목사의 성직자상을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성직자는 늘 외로운 존재이다. 많은 사람의 물결을 타고 다니지만 정착할 곳이 없다. 그들의 벗이 되어 주건만 그들이 성직자의 벗은 못 되어 준다. 오히려 자기만의 대상이 안 되어 준다고 비난을 받고 헤아림의 대상이 된다. 이 외로움은 하나님을 향하게 한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께도 버림을 받는 듯한 단절의 비애도 느낀다.
우리 황광은 목사는 많은 사람의 목사였다. 많은 사람의 기쁨도 되어 주고 심부름꾼도 되어 주었다. 그러나 그의 수고와 봉사는 오히려 그를 이용이나 하고, 혹은 유학을 시켜 준다는 약속 등이 모두 식언이 되어 버린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건만 그는 묵묵히 살았다.
그러기에 외로웠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가 쓴 마지막 소리인 ‘까치’라는 벗을 기다리는 동요 한 편은 깊은 뜻을 내포한 것 같다.
성직자는 믿는다. 무엇보다 믿고 산다. 하나님을 믿고 사람을 믿고 산다. 이 믿음으로 황 목사는 살았다. 그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깨끗이 해낸 것이나, 큰 일을 척척 처리해 간 데는 이 믿음이 작용하였었다. 그 진보적인 생각과 칼날같이 예리한 비판력, 또 강직한 성격이 분열과 파괴에 작용될 만했으나, 믿음에서 화해와 협동을 몸소 실천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도 철저했고 사람도 철저히 믿었다. 그러나 믿었던 이에게 배신도 당했다. 그는 그래도 믿었다.
성직자는 항거한다. 인간의 부조리와 인간의 온갖 부정과 사회악과 싸워 부패를 막아야 한다. 이 뿌리를 빼고 근원을 밝히기 위해 싸워야 한다. 황 목사는 이것들과 몸부림치며 싸웠고 항거했다. 더욱이 교회의 분규와 혼란 앞에서 과감하게 싸웠다.
그의 저항은 그리스도의 뜻을 순종하기 위한 항거였다. 이 저항자 황광은은 강단에서, 지면에서 이들을 고발했다.
성직자란 큰 교회 목사도 아니요, 큰 기관 총무도 아니다. 황 목사처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진실히 그리고 간결히 살다간 사람이 성직자다. 그의 강단은 ‘몸의 강단’이었다. 막연한 개념이 아니라 문제와의 씨름이요, 사건과의 싸움이요, 항거의 부르짖음이요, 외침이요, 어버이의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황 목사와 형제처럼 지낸, ‘성직자’의 간행자 안성진 목사는 또 이렇게 추도하고 있다.
나는 황 형의 서거처럼 슬퍼 본 적은 없었습니다. 정말 가슴이 쓰라렸습니다. 그가 설교집 한 권을 내고 싶다면서 아픈 병상에서도 기어이 원고를 정리하던 그 모습을 기억하니 또 다시 슬픔이 북받칩니다.
그가 소천(召天)되기 바로 몇 주간 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이 설교집 출간을 결심했을 때입니다. 나는 그가 그처럼 기뻐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습니다. 정말 어린애처럼 기뻐했습니다. 책의 제호며 편집 배열이며 제본 방법까지를 서둘러 가며 설명할 때 어딘가 나는 이상한 느낌마저 들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아, 황 형 그게 모두 형이 가실 준비였던 것을 내가 어떻게 알았으리오? 정말 허망하기 그지 없습니다. … 책은 나오고, 형은 가시고-이젠 이 책을 형의 영전에 바쳐야 하는 이 허전감.
그러나 그는 훌륭하십니다. 그 많은 일을 한꺼번에 하시다 돌연히 가시면서도 기어이 성직자로서의 ‘영원’을 남기는 유업마저 손대어주신 그 훌륭함을 감격과 함께 찬양하는 바입니다. 이 거룩한 그의 영음(靈音) ‘설교집’이 그가 아끼던 영암교회를 비롯해, 전 한국교회에 영원히 빛으로 남을 것을 믿어 마지 않습니다.
그의 삶은 너무나 짧으셨다
황 목사가 서거한 다음 날인 1970년 7월 16일, 황 목사가 오래 봉직했던 대한기독교교육협회의 그 당시 총무였던 한영선 목사는 다음과 같은 추도사를 썼다.
친애하는 고 황광은 목사! 어제 나는 놀랐소! 당신의 부음을 듣고서, 사무실에 찾아 온 손님과 이야기하던 중 직원이 들어와 당신의 부음을 전할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무어?’ 하고 소리질렀소. 그러나, 그 소리는 아무 메아리조차 없이 어디론가 흘러가 버리고, 고독과 비애가 나를 엄습하였소. 암만 생각해도 믿어지지 않았으나, 당신 관 앞에 읍하고 당신의 영상을 바라보니 당신의 죽음이 사실이라 느껴지오.
아! 지난 날의 당신을 생각하니 떠오르는 생각도 가지가지, 무슨 말을 먼저 해야 좋을지 갈피조차 못 잡겠소. 당신은 일만 알던 사람이오. 일이라면 먹는 것 마시는 것 다 잊고서 그 일이 끝날 때까지 골몰하던 이가 바로 당신입니다.
고아들의 형님이었고 보이스카우트의 지도자로, 자라나는 어린 싹을 키우려 내 몸 아끼지 않은 분이 당신이었소.
당신은 합치기를 좋아하던 대표적 인물이오. 하나님의 교회가 금이 가는 것이 보일 때 그것을 때워 보려고 동분서주하며 이 사람과 이야기하고 저 사람에게 호소하던 그 모습 지금도 눈에 암암하오.
자라나는 새싹들을 바로 키워 보려고 동화를 지어 책으로 엮고, 어린이 부흥회를 열어 수많은 어린이를 울리고 웃기고, 교실에서 많은 학생에게 크나큰 감화를 준 이가 바로 당신이었소.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