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그는 간성에서 아들 사랑하기로 유명한 아버지가 됐다. 하루는 평소 한가할 때마다 바둑을 두며 친한 사이가 된 경찰서장이 특별한 부탁을 했다. 강릉에 사는 형이 담석증 진단을 받았는데 내가 수술을 해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큰 병원에서 찍은 엑스레이 필름까지 가지고 왔다. 아마도 수술 비용을 줄일 생각으로 하는 말 같았다. 정미소 자리에 세운 병원에 변변한 시설이 있을리 없었으나 수술을 원해서 날짜를 잡았다.
경찰서장의 형님에게 담낭 수술을 하기 전날, 내가 살던 고향 성진에서 피난을 내려왔다는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성진에서 의학전문학교를 마칠 무렵 피난을 왔기 때문에 남한에서 다시 의사가 될 준비를 하는 중이라고 했다. 당시 보건부에서는 월남한 사람들 가운데 의학 공부를 한 경우, 시험을 거쳐 의사 자격증을 주고 무의촌 의사로 파송하는 제도가 있었다. 그가 바로 그런 경우였는데, 간성에 세브란스 출신 의사가 개업했다고 해서 호기심에 찾아왔다고 했다.
그는 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무시했다고 한다.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종합병원에서 수련의 과정까지 마친 전문의가 오죽 실력이 없으면 강원도 시골까지 왔을까 하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웬일인지 나를 꼭 만나보고 싶어서 간성까지 찾아왔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수술 일정을 말해주었다.
“사실은 내일 큰 수술이 있습니다.” “무슨 수술인데요?” “담낭 절제 수술입니다.”
“그래요? 몇 시에 하는지요, 제가 와서 봐도 되겠습니까?” “2시에 하는데 얼마든지 보셔도 됩니다.”
내가 흔쾌히 승낙하자 그는 매우 놀라는 눈치였다. 실력 없는 의사인 줄 알았는데, 뜻밖에 수술 장면을 당당히 공개한다니 놀란 것이다.
수술 당일, 나는 마스크 마취법으로 수술을 시작했다. 여건이 어려웠으나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다. 이후 그는 매일 찾아와서 수술한 환자를 만난 후 나와 대화를 나누곤 했다. 환자가 퇴원한 다음 날, 그가 나를 찾아와 말했다.
“그동안 몰라뵈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이런 실력이면 간성에 계시기보다 속초로 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속초로 병원을 옮기시지요.”
나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돈을 벌려고 의사가 되었다면 이런 곳에 오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무의촌 의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대한민국에 아직 무의촌이 많다는 사실은 선생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의료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분들에게 작은 힘이나마 도움이 될까 해서 여기에 온 것입니다.”
“그러시다면 더더욱 속초로 가셔야 합니다. 속초는 강 선생님 같은 분이 일하시기에 더 적합한 곳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속초에서 북방 한계선까지 큰 수술을 할 수 있는 의사가 없습니다. 중환자가 생기면 큰 병원으로 가야 하는데, 대부분 속초로 내려 와서 수술 여부를 결정합니다. 말하자면 강원도 동쪽에 사는 환자들은 일단 속초로 모인다는 뜻이지요. 그러니 무의촌에 계신다고 해서 능사가 아닙니다. 강 선생님이 속초에 계셔야 강원도 환자들에게 진짜 도움이 될 겁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깊이 생각한 후, 속초로 병원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간성에서 정미소에 병원을 개업한 지 3개월만인 1970년 12월 1일, 속초시 금호동에 ‘대동의원’을 개업했다. 가족들도 속초로 주거지를 옮겼다. 나는 빠른 속도로 속초 사람이 되어갔다. 속초시 청학동에 있는 속초중앙교회를 섬겼고, 1977년에 장로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