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쉼터] 내 평생에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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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에 학교에 다니는 학우들과 어울리기보다는 교회에서 만난 청년부원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서 찬양대원을 하는 것은 물론 틈이 나면 함께 모여 남성 중창단을 만들어 찬송가를 비롯해 가곡이나 팝송(Pop Song)에 이르기까지 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어느 정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박수를 받기도 했다. 어떤 때에 장례식에서 불렀던 찬송가(내 평생에 가는 길, 413장)는 많은 교인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불렀던 우리들도 커다란 은혜를 받아 내 일생을 지배하는 찬송가이기도 하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주 오셔서 세상을 심판해도 나의 영혼은 겁 없으리”

곡조도 좋지만 그 가사에서 묻어나는 영감이 더욱 나를 감동시켰다. 작사자가 그렇게 심한 고통 속에서도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그 섭리에 순종하면서 새롭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세가 ‘욥’의 신앙과 같다고 여겨 찬송가의 욥기라고 칭함을 받는 찬송이었다. 따라서 나도 울적한 일이 있을 때나 어려운 일이 닥칠 때에 혼자서 이를 음미하면서 마음에 평안을 얻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 찬송가가 어떠한 경로를 통해 나오게 된 연유를 알고부터는 더욱 애착을 갖게 되었다.

호레이쇼 스패포드(Horatio Spafford)는 1860년대 시카고에서 법률회사 대표이자 의과대학의 법리 교수요, 노스웨스트 장로교신학교의 이사 및 운영위원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또한 그와 그의 아내는 세계적인 전도자인 무디와 절친한 친구로 무디교회의 회계 집사와 주일학교 교사로 섬겼던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그런데 그가 43세가 되던 1871년 시카고 북쪽 지방에 투자했던 부동산이 시카고 대화재로 전소해서 전 재산을 잃었고, 그 직전에 전염병으로 첫째 아들도 잃었기에 이런 엄청난 시련 앞에서 그와 가족은 휴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가족과 함께 1873년 유럽으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때마침 유럽에서 복음 사역을 하던 무디의 종교 집회도 돕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스패포드는 갑자기 급한 사업상의 일이 생겨 그는 며칠 후에 가기로 하고 아내와 네 딸만 유럽으로 떠났다. 그러나 그의 가족이 탄 여객선은 대서양에서 영국의 철갑선과 충돌하여 네 딸은 사망했고, 부인만 구사일생으로 구조되었다. 얼마 후에 이런 비보를 접한 그는 정신없을 부인을 만나러 즉시 배를 타고 유럽으로 향했다. 그가 탄 배가 사고 지점을 통과할 때에 그는 배 위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울부짖었다. 그러나 잠시 후에 그는 원망 대신에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평안을 고백하게 되는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평안해, 내 영혼 평안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어다!” 그리고 아침이 되자 스패포드는 주님이 주신 영감으로 시를 써내려 갔는데, 그 시가 바로 ‘내 평생에 가는 길’이다. 현대판 욥이라 불리는 스패포드 부부는 예루살렘으로 이주해 남은 여생을 이슬람교도와 유대교인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고 나누었다. 이렇게 주님이 주신 시련을 이겨내고 주님의 참 제자로 일생을 보낸 수도자가 지은 은혜의 찬양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큰 환란이 닥쳐와 보통 사람은 이를 극복하기도 어렵지만 오히려 이를 승화시켜 새로운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승복하고 어려움을 극복한 참된 믿음의 승리자가 만든 찬송이다.

백형설 장로

<연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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