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긴과 보아스]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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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제 부친께서 구순을 맞으셨습니다. 4년 전 갑작스레 임종 준비를 했고 빈소를 알아보았는데, 위기를 넘기신 후 요양병원과 중환자실을 오가다가 지금은 팔순 중반을 넘긴 모친께서 댁에서 간병을 하고 계십니다. 죽음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생 일대의 사건입니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입니다. 그런데 존엄하고 품위있게 삶을 마감하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알려주지 않고, 배우려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서로 이야기하지도 않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는 4층이 없습니다. 죽음은 모두가 생각하기 싫어하는 주제입니다.

의료기술의 발전으로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현대 의학이 마치 죽음도 치료 가능한 영역처럼 여기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야말로 노화에 의한 자연사가 무색해진 시대입니다. 

30년간 의사로서 수많은 임종환자를 경험하며 쓴 김현아 교수의 ‘죽음을 배우는 시간’에는, 가정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비율이 1980년말의 통계에 의하면 77.4%였고 의료기관이 12.8% 였는데, 2018년 통계에서는 의료기관에서 임종 비율이 76.2%인 반면, 가정에서 임종하는 경우는 14.3%로 뒤바뀌었다고 보고합니다. 

바람직한 임종 장소가 어디면 좋겠느냐는 설문의 응답으로는 절반 이상인 57.2%가 가정에서 가족과 함께 품위있는 임종을 맞이하길 바란다고 답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다 보니, 죽음을 일상에서 경험하는 경우가 흔치 않게 되었습니다. 죽음은 항상 우리 곁에서 일어나는 현실인데, 제가 사는 신설동역 근처의 장의사 간판도 사라졌습니다. 죽음은 우리의 삶과는 머나먼 현실이 된 듯합니다.

중세시대 수도원이나 교회 근처 공동묘지에는 다양한 작가들의 ‘죽음의 춤’이라는 벽화가 있습니다. 공통점은 왕이든 귀족이든 사제든 평민이든 계층을 막론하고 누구나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죽음이 일상적인 것임을 알려주기 위한 목적으로 그려진 벽화입니다. 중세시대 죽음에 대한 인식은, 죽음이 두렵지만 죽음은 일상이니 죽음을 의연하게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삶 속에 있는 죽음의 현실을 망각하거나 회피하지 말고 그것을 직시함으로 삶의 지혜를 얻으라고 말씀합니다. 삶 한가운데서 죽음을 의식할 때, 인간은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 지혜를 얻을 수 있기에 모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편 12절)

평소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기에 정작 죽음의 순간이 왔을 때 대다수는 죽음을 준비하지 못한 채 응급실이나 중환자실에서 혹은 긴 투병 끝에 요양병원에서 마지막을 맞이하게 됩니다. 삶의 질만큼 중요한 것이 죽음의 질이고, 정말 잘 산다는 것은 잘 죽는 것인데, 정작 사는 것에만 관심을 쏟느라 죽음을 잊은 채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치열한 삶 속에 다시금 죽음을 생각해 봅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누구에게나 죽음을 배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죽음을 준비하지 않으면, 죽음보다 더 나쁜 일들이 일어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삶을 잘 마무리하는 시간을 갖지 못하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연명의료에 매달리는 임종 문화는 변해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말입니다. 죽음을 준비하고 계신지요? 저 자신에게 먼저 질문을 던져 봅니다.

유상진 목사

<영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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