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인정 받은 소중한 사회 인연… 훗날 큰 ‘자산’ 돼
눈앞의 ‘밥벌이’ 밖에 생각하지 못했는데,
한 단계씩 밟아 나갈 길까지 예비해 두셨다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이런 분들을 가까이에서 보고 이야기를 들으며 간접 체험을 해볼 수 있었던 것은 귀한 경험이었다. 덕분에 이후 사업을 할 때,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나보다 높은 위치의 사람을 만나도 위축되지 않고 말을 건넬 수 있었다. 이런 당당함이 있어야 창의적인 생각도 해낼 수 있고, 이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도전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사업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단초는 이때에 만들어진 셈이다. 소망교회 장로로 시무하면서 교회 안의 대단한 인재들과 수평적으로 대화하고 협력하면서 어려운 사역들을 해낼 수 있었던 것도 이때의 경험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무일푼 청년을 믿어준 권사님
우리 형제가 신촌장로교회에 출석하게 된 시작도 묘하다. 형님은 군에서 제대할 때 폐병에 걸린 상태였다. 그 시절에는 군대에 가면 영양실조에 폐병 걸려서 나오는 일이 흔하다고 했는데, 형님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병원에 입원해 치료받을 형편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형님은 기도원을 수소문해 들어갔다. 지금의 관악산 서울대 자리에 기도원이 있었다. 기도원 건물과 숙소 바로 옆에 개인이 지은 작은 토담집 두 채가 있었다. 신촌장로교회 권사님이 지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쓸 수 있도록 두 집 중 한 채를 내어놓으셨다고 했다. 형님이 이 집에서 생활하는 동안 옆집으로 권사님을 비롯한 교인들이 가끔 기도하러 오셨고, 자연히 이분들에게 형님의 처지가 눈에 띄게 되었다. 젊은 청년이 폐병에 걸려서 혼자 지낸다 하니 곧 권사님, 집사님들이 쌀을 갖다 주고 반찬을 해다주면서 돌봐주셨다. 그 인연이 이어져서 나중에 우리 형제가 신촌장로교회에 출석하게 된 것이다. 당시 우리 형제는 영등포에 살면서 그 지역 교회를 다니기는 했으나 처지가 불안정해서인지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건강을 회복한 형님을 따라 나도 신촌장로교회로 옮겨가게 됐다.
그리고 그 토담집의 주인인 김성환 권사님은 이후 내 인생에서 몇 번이나 중요한 역할을 하셨다. 그중 하나는 내가 동대문에서 일하기 시작한 뒤, 사업 시작을 위해 200만 원이라는 큰돈이 필요했던 때였다. 동대문 원단 사업에 어떻게든 들어가 보려고 반년 넘게 아등바등 해온 나에게 200만 원을 투자할 기회를 얻었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어디서 이 돈을 빌릴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을 때 나에게 떠오른 사람은 오로지 그 권사님뿐이었다. 형님의 인연이 아니었으면 내가 그렇게 재력 있는 분과 알게 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주일학교 교사를 시작하자 역시 교사로 봉사하고 계셨던 권사님을 뵐 일이 더 많아졌다. 알고 보니 권사님은 이북 선천에서 열아홉 살에 시작한 교회학교 교사를 일흔이 되기까지 50년간 이어오셨다고 했다. 젊은 교사들에게 늘 인자한 어머니처럼 대해 주셨다.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남편 되시는 집사님이 삼성에서 인수한 조미료 회사 ‘미풍’을 창립한 분이셨다. 부유한 집안 사람 중에 저렇게 겸손하고, 검소하고, 봉사에 열심인 분도 있구나 하고 권사님을 보면서 내심 감탄한 적이 많았다.
그렇다 해도 나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따로 이야기를 나누거나 식사를 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찾아가서 돈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은 몹시 무례한 일이 될 수 있었다. 게다가 200만 원이면 그때 서울 변두리에 기와집 한 채를 살 수 있을 만큼 큰 돈이었다.
그럼에도 도무지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었던 나는 용기를 내서 권사님 댁을 찾아갔다. 권사님은 반갑게 맞아주셨지만 나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아무 말도 못하고 앉아 있기만 했다. 평소 쾌활하다고 칭찬을 받기도 했던 내가 그러고 있으니 뭔가 짐작이 되셨는지 권사님께서 먼저 “요즘 하는 일은 어떤가?” 하고 운을 떼셨다.
동대문시장에서 6개월간 무보수로 일한 과정과 원단 사업의 특징과 전망, 내 점포를 운영할 수 있는 기회를 제안받은 일까지 설명하는데 등과 이마에 땀이 돋았다. 거기까지 들은 권사님이 대뜸 “그 사업을 같이 하려면 자네 돈이 얼마가 필요한가?” 하고 물으셨다.
내가 “200만 원입니다”라고 모깃소리만큼이나 작게 대답하자 그 분은 잠시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아무 연고도 없이 교회에서 만난 사이일 뿐인데 이렇게 큰 돈을 빌려달라고 하는 게 아무래도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 되는구나 하는 체념과, 저 분도 얼마나 곤란하겠는가 싶은 생각까지 겹쳐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알았네. 내가 빌려주겠네.”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권사님, 정말 감사합니다!”
“박 선생은 성실하고 부지런하니 성공할 걸세.”
언제까지 갚으라는 둥, 조건에 대한 말씀은 전혀 없이 권사님은 칭찬과 격려를 해주셨다.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구하고자 한 자금을 얻은 것보다도 사회에서 만난 관계에서 처음으로 신뢰와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 황홀할 만큼 기뻤다. ‘내 일’이라는 것을 처음 시작하는 시점에 이처럼 신뢰와 인정을 받은 경험은 훗날까지도 큰 자산이 됐다.
권사님께 빌린 200만 원은 3년쯤 후에 이자까지 보태서 갚아드렸다. 그 3년 사이에 사업이 꽤 자리를 잡았기에 어렵지 않게 갚아드릴 수 있었다. 권사님께서는 기분 좋게 돈을 받으시면서 “이렇게 잘 될 줄 알고 있었네”라고 말씀해주셨다. 어쩌면 나 자신보다도 더 나를 믿고 계셨던 것 같다.
지금 돌아보면, 만일 서원기도에 순종해 주일학교 교사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어렵게 찾아온 사업의 기회도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기도하며 일자리를 간구할 때는 눈앞의 ‘밥벌이’밖에 생각하지 못했는데, 하나님께서는 한 단계 한 단계씩 밟아 나갈 길까지 예비해 두셨던 것이다.
가장 귀한 인연, 아내를 만나다
권사님과의 인연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나는 사업을 시작하고 얼마 후에 권사님으로부터 그분의 외손녀 뻘인 친척을 소개받았다. 바로 내 아내 이미순 권사다.
사실 그때 나는 결혼할 형편이 안 되었다. 돈벌이를 제대로 못한 시기가 3~4년이나 이어졌고, 이제 막 할 일을 찾았다 싶으니 어느덧 스물여덟이 돼 있었다.
막 시작한 사업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곤 했지만, 실은 자격지심도 있었다. 신촌장로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며 이런 저런 직책을 맡던 중에 초대 청년회장을 지내기도 했는데, 교회가 신촌에 있다 보니 유독 여대생들이 많았다. 청년회장의 역할 중에는 야유회 등 교회 행사가 있을 때마다 여성 청년들의 부모님께 허락을 구하는 일도 있었다. 그때만 해도 딸을 엄하게 단속하는 집안들이 많았기 때문에 행사가 있는 주간이면 전날 밤 11시까지도 심방을 다니면서 독려를 해야 했다. 그럴 때 부모님들 중에는 “박 집사가 책임지고 데리고 간다면 허락해 주겠네”라면서 은근히 호감을 표하는 분들이 있었다. 들려오는 말로는 여학생들 중에도 나를 좋아하는 이가 꽤 있다고도 했다.
박래창 장로
<소망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