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도의 문학산책] 영원한 보헤미안 조병화 시인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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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나의 천적(天敵)은 나였던 거다”

편운(片雲) 조병화(趙炳華, 1921~2003) 선생은 나의 대학 스승이시다. 그는 스승 이전에 한국어로 시를 쓰는 대문호이다. 김소월의 월계관을 이어받아 국민적 호응을 받는 지경에 이른 시인이다. 학부와 대학원 시절과 그 후 교수 요원으로 함께 근무했던 기간까지 합쳐 보면 오랜 세월을 가까이에서 모셨던 분이다.  

선생님을 자주 대하며 그의 생활신조나 행동거지에서 받은 인상 중에 한 두 가지를 소개하려 한다.

선생님께선 엄격히 시간을 지키는 분이셨다. 언젠가는 밖에 나와 점심을 함께 먹고 연구실로 올라가다가 지인을 만났다. 지인은 선생님에게 커피를 대접하겠노라고 간청을 했으나 선생님은 그럴 시간이 없다고 사양했다. 연구실에 돌아와 차를 마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미리 약속하지 않은 시간은 공연히 낭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직장 생활 13여 년 만에 대학원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한번은 강의가 있는 날 20분 전에 연구실로 오라는 조교의 전갈을 받았다. 시간에 맞춰 문리대학장(당시)실로 방문했더니 내가 제출한 리포트를 펼쳐 보이면서 야단을 치셨다. 내용인즉 원고지에 쓴 글씨가 괴발개발 난필이어서 읽어 보시기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이었다. 빨간 색연필로 여기저기 표시를 해 삐뚤어진 글씨를 지적하셨다. 나는 죄송스러워 몸 둘 바를 몰랐다. 이렇게 선생님께서는 매사에 직선적이고 솔직한 성품이셨다.

조병화 시인은 세계 여기저기를 누비고 다닌 고독한 보혜미안이었다. 62.5사변으로 국토는 초토화 되었고 휴전후(休戰後) 개인의 일상은 가난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던 시절, 그는 절망과 좌절의 시절을 극복하려는 의지로 여행을 계속한 것이다. 그의 상징물로는 파이프, 베레모, 진홍의 스카프를 들 수 있다. 

서울 중고교 시절 조병화 선생에 관 한 에피소드 한가지. 안병욱 선생의 제자였던 이상범 교수의 증언에 따르면 경성사범학교 입학시험에서 선우휘(작가, 언론인)가 1등, 조병화가 2등으로 합격했다. 졸업 시에는 조병화가 1등, 선우휘가 2등 이었다는 후문이다.

그 후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 3학년 때 해방으로 귀국했다. 물리학을 전공하며 럭비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지덕체를 겸비한 신사풍의 시인이었다.

내가 그의 시를 처음 읽은 것은 첫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49)>에 수록된 ‘소라’ 등이다.

소라

바다엔/소라/저만이 외롭답니다

허무한 희망에/몹시도 쓸쓸해지면/소라는 슬며시/물속이 그립답니다

해와 달이 지나갈수록./소라의 꿈도/바닷물에 굳어 간답니다

큰 바다 기슭엔/온종일/소라/저만이 외롭답니다.

조병화 시인은 우리 현대사를 모두 체험한 세대에 속한다. 일제의 식민지화, 2차 세계대전에서 해방, 분단, 6.25동란, 남북간의 정치 이념적 갈등, 새마을 운동과 경제성장 등이 외견상 특정할 수 있는 사항이다. 20세기를 겪는 정신적 질곡(桎梏)과 소외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곧 세계를 자유롭게 여행하며 스스로의 고독을 형상화해 간 보헤미안이 된 것이다.

“결국, 나의 천적은 나였던 것이다”라고. 이는 자신의 좌절과 절망을 스스로 극복한 좌우명이 된 것이다.

박이도 장로

<현대교회•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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