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포럼] 분단의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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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쟁점은 분단의 역사다. 남북 분단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 하는 점이다. 쉽게 말하면 이승만이냐 김일성이냐 하는 논쟁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더불어 해방은 되었지만 자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고 전후 처리 과정에서 얻어진 행운이었다. 그러나 불행은 곧 시작되었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이 소련을 대일전에 불러들인 것이 화근이었다. 소련은 참전에 동의하고,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투하되자(1945.8.6) 이틀 뒤에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군의 일원이 되었다. 8월 8일 나진공습을 시작으로 9일에는 웅기를 폭격하고 12일에는 해병대가 청진에 상륙했다. 21일 원산, 24일 평양에 입성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무혈 입성한 것이다.

그리고 곧 소련이 지배하는 공산정권을 세웠다. 1946년 2월 8일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 정부도 생기기 전에 벌써부터 독재체제에 들어갔다. 그리고 1948년 4월 19일에 개최된 전 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개최하면서 남한의 대표들을 초청하여 ‘남북협상’을 통해 김일성 체제를 인정받고 싶어했다. 김구, 김규식 등 남한 대표 151명이 평양에 들어갔다. 그러나 김일성은 토론의 기회도 주지 않고 이들을 김일성을 지지하는 박수부대로 이용했다.
한편 얄타회담에서 처음 거론됐던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 문제가 마침내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모인 미·영·소 3국 회의에서 결정됐다. 이 소식이 12월 28일 한국에 알려지자 극심한 좌우 이념대립을 불러왔고, 남한은 반대, 북한은 소련의 지시로 찬성했다. 이때부터 분단은 예고되었다. 북한이 신탁통치를 찬성한 것은 이미 북한에는 소련의 통제하에 신탁통치와 같은 공산정권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반도 단일정부를 세우기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됐지만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결국 미소 공동위원회는 1947년 9월 17일 신탁통치 포기를 선언하고 모든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시켰다. 유엔에서는 유엔 감시 하에 남북한 자유선거를 통해 단일정부를 세우기로 의결하였다. 그리고 남북 양측에 유엔감시위원단을 파견했다. 그런데 남한은 받아들였지만 북한은 유엔위원단의 입국을 거절하고 소련 주도의 ‘조선인민공화국‘ 체제를 고수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남쪽에서는 이승만이 주도하는 단독정부론이 대두되었다. 결국 타협점을 찾지 못하자 1948년 5월 10일 유엔 감독 하에 남한만의 자유총선거가 실시되고 198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되었다. 그리고 7월 17일 대한민국헌법이 통과되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공포되었다.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가 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결국 분단의 책임은 김일성에게 있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소련 주도의 북한 정권을 미리 만들어 놓고 유엔의 단일정부 수립을 위한 감독기능을 거부한 김일성이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 독립을 위해 장기간 투쟁해온 민족지도자들의 통일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만일 그때 북한이 유엔총회 결정을 찬성하고, 5.10 총선거를 순조롭게 받아들였더라면 분명히 하나의 단일정부가 세워졌을 것이다. 38선도 없어졌을 것이고, 6·25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분단의 책임은 38선을 그은 미·소 강대국에 1차적인 책임이 있지만 우리의 책임 밖에 있는 사안이고 국내 문제에서 책임 소재를 따진다면 유엔의 결의를 무시하고 소련에만 의존해 온 김일성에게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사파들은 이승만에게 책임을 전가시키고 있다. 이는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고 남에게 책임전가 시키기를 좋아하는 좌파들의 주장에 불과하다.
한편 북한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북한에서는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영구분단의 장벽을 쌓았다. 이로써 한반도의 분단은 고착화되었다.

배영복 장로<연동교회>
• 한국예비역기독군인연합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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