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에 올라서 보니 천하가 작구나”(登泰山小天下)이 말은 공자가 주유천하 하던 중 태산에 올라가서 외쳤던 말이다. 중국에는 오악(五嶽)이 있다. 동쪽에는 태산(泰山) 서쪽에는 화산(華山), 남쪽에는 형산(衡山) 북쪽엔 항산(恒山) 중앙엔 숭산(嵩山)이 있다. 그중 태산은 제일 먼저 해가 뜨는 산이면서 중국의 천자(天子)가 하늘과 접촉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높이는 1.545m밖에 안 되지만 다른 산에 비해 의미가 깊은 산이다.
공자의 생애는 56세가 분기점이다. 그 이전의 삶에는 특기할만한 게 없다. 무명 집안에서 태어나 자수성가하여 대사구(大司寇)라는 법관이 되었지만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다. 56세 때 노(魯)나라 군주 애공(哀公)과 갈등이 생겨 결국 사표를 내고 14년간 중국 전역을 떠돌아 다녔다(周遊天下). 마치 예수의 광야 체험이나 석가의 출가(出家)처럼 안락과 평온을 버리고 고행을 시작한 것이다. 안정된 조직을 버리고 광야를 유랑하는 것은 현대판 무전여행 또는 배낭여행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여러 종류의 인간들을 만나고 예측불허의 고행을 겪으면서 소위 인류 보편적인 진리를 찾아내게 된 것이다. 한군데 붙박혀 사는 사람은 고정된 시각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보편적 진리를 깨닫기가 쉽지 않다. 우주의 별들도 정리되어 있지 않고 인간도 실제로 많은 유랑을 통해 발전되는 것이다. 공자는 56세부터 약 14년간 유랑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경험했다. 69세에 조국으로 돌아와 73세에 죽을 때까지 유랑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을 정리했다. 그 후 魯나라의 지방역사책인 춘추「春秋」를 다시 정리하고 유행가 가사들을 모아「시경」(詩經)을 편집했다. 직접 지은 것은 아니지만 편집하고 주석을 달았다. 그는 태산에 올라 본 후 식견과 생각이 바뀌었다. 물에 빠진 자는 바닥을 쳐야 다시 뜰 수 있다. <주역>에 나오는 궁즉변(窮則變)이 생긴 것이다. 힘들고 어려운 경험을 통해서 자기가 새로워지고 단단해질 수 있다. 魯나라 궁정에 머물렀다면 로컬 지식인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시련을 겪음으로 세계적 지도자(global leader)로 재탄생할 수 있었고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여름에만 사는 매미는 겨울을 알 수 없고 하루만 사는 하루살이는 ‘내일’이란 말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Alvin Toffler가 쓴 ‘부의 미래’(Revolutionary Wealth)에서는 시간(time) 공간(space) 지식(knowledge) 기반(fundamental)의 그물망을 강조한다. 미래의 주인공은 시간의 속도와 공간, 지식의 기반을 파괴해야 한다는 것이다<登泰山小天下>(떵타이샨, 시아오티엔시아) 가 바로 그런 것이다. 공자 사후 350년쯤 사마천이 <史記> 안에 공자세가(孔子世家)를 넣어 공자의 인생사를 기록했다. 숙량홀이라는 장군 출신의 퇴역군인이 세 번째 부인으로 안 씨 집안의 셋째딸 안징재(顔徵在)와 들판에서 야합(野合)해 낳은 아들이 공자다. 첫 번째 부인과는 딸만 9명을 두었고 두 번째 부인과는 아들 하나를 얻었는데 변변치 못했다. 공자의 이름은 구(丘)요, 자는 중니(仲尼)라 했다. 공자는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기에 어머니 교육에 의존했다. 이율곡과 한석봉의 어머니처럼 특별한 어머니 교육을 받았고 당대 중국 지식인들의 교과과목이었던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의 6 예를 공부했다. 예는 제사 예절, 악은 음악, 사는 활쏘기, 어는 말타기, 서는 글씨쓰기, 수는 셈하기였다. 그리고 15세(志學)에서 30세(立)까지 15년간 1만 시간의 노력을 했고 40세(不惑), 50세(不動心/知天命), 60세(耳順) 70세(從心所欲不踰矩)를 거쳐 73세에 사망했다. 유년기는 불운했지만, 인생 재기에 성공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가르쳤다. 본인이 당대에 뜻을 이루진 못했지만, 맹자에 의해 계승되었고 한무제(漢武帝)에 의해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되어 곳곳에 사당들이 세워지기도 했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인간도리를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 주고 있다.
김형태 박사
<한국교육자선교회 이사장•더드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