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가 암흑에서 벗어나 여명이 비쳐올 때 복음을 전해 주시고자 이수정을 일본으로 보내셨다. 이수정은 한글 성경을 번역하여 언더우드를 통해 고국에 전하고 세례 요한처럼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는 성경 위에서 이루어진다.
이수정을 순교자로 인정하는 이들이 있다. 그가 세례 받은 교회에서 오랫동안 목회한 이나가끼(稻桓德子) 여자 목사는 이수정이 순교자라고 주장한다. 김수진도 이수정이 순교했다고 믿는 사람 중 하나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료가 없다.
마지막으로 이만열은 <이수정의 개종과 활동>(빛과 소금, 1988.5. p.210-211)에서 “이수정이 1886년 5월 12일 귀국하여 국내에서 은거하다가 병사했다”고 서술했다. 허순길은 <한국장로교회사>에서 “1886년 5월 그는 귀국하여 은거하던 중 병사하게 되었다”고 기록했다. 김해연도 <한국교회사>에서 “1886년 이수정은 귀국 후 다소 간 고종의 환대를 받았으나 곧 일본에서 자객에게 얻은 상처로 득병하여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에 대해 강력한 주장은 오윤태이다. 그는 <한국 기독교 사:선구자 이수정> 편에서 처형 설은 오보라고 했다. “귀국한 이수정은 고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왔는데 교계 및 관계에 그에 관한 기록이 없다”고 했다.
이수정의 기록을 읽으면서 가장 큰 의문이 하나 있다. 그의 이름이 여러 곳에서 가려져 있다는 것이다. 먼저 그의 본이 확실치 않으며, 임오군란 시 민비를 살린 공로자 중 한 사람으로 선략장군 칭호까지 받았다고 하나 정식 역사에는 그의 이름이 없다. 또 일본에 파견되는 신사유람단원의 명단에도 그의 이름은 없다. 그 이유로 민비를 구출한 사람으로 대원군파에게 경계 받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하튼 그의 이름이 빠진 곳들이 있다. 그가 귀국했을 때 함께 온 사람들이 처형당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았는데 그것이 이수정이라는 추측을 하고 있다.
밝혀져야 할 이수정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는 가려진 사람이었다. 그의 관직, 일본에 잔류한 것도 어떤 임무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지만 일본에서의 4년간의 행적은 뚜렷하다. 그의 관직이나 인삼장사치로서의 행적이 아니다. 변화된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한국교회에 초석을 놓았다. 그리고 귀국하므로 그의 삶이 끝났다. 미스테리의 기독교인이었다.
이수정이 순교자라고 인정하는 이들이 많다. 오늘 그의 무덤도 모르며 그를 위한 기념비조차 없다. 그리하여 그의 성경 번역의 공로와 선교사 유치를 위한 호소에 대한 업적을 기리는 일이 없다. 그의 선구자적인 업적이 그냥 묻혀서는 안 된다는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장 박 경진 장로의 주장에 의하여 이수정이 재조명되고 있다. 바라기는 역사적 사료가 발굴되어 확실한 증거를 갖고 진행되었으면 한다.
한 사람의 삶은 그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수정은 19세기 말 한국인으로 일본에서 그의 삶의 꽃을 피웠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고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그의 죽음은 여기에 뜻을 두고 있었다. 그는 전혀 한국인에게 소개되지 않았다. 역사가들에 의해서 발견된 사람이었다. 만일 그가 없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이것은 상상하기도 싫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그의 일꾼들을 숨겨 두시고 개발하셔서 쓰셨다.
이수정은 한국교회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존재이며, 그로 인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크게 나타난 것이 확실하다. 여러 면에서 의문이 많은 것은 그의 사료가 아직 발견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러 학자들이 여러 가지 사료에 의해서 그를 해석하고 있다. 역사가들의 상상이 동원된다. 사료에 대한 해석을 바로 해야 한다. 어떤 역사가는 픽션을 쓰는 경우도 있다. 아니면 너무 편협된 해석을 하는 경우도 있다. 객관적이고 중립적 이성적 역사적 해석을 할 수 있는 분이 훌륭한 역사학자라고 여겨진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