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삶은 생활의 여백이 없다.
누구나 욕심껏 가득 채우려는 자들로 북적일 뿐 ‘우리’라는 공동체를 위해 여유로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자가 몇이나 될까? 우리의 정신을 조용히 들어다보자. 그러면 스스로 부끄러움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에 끌려 살아가기도 하고 무엇에 의해 지배당하며 살아가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삶은 결코 자기의 삶이 아니다. 그 하나의 예로 물질에 지배당한 삶을 보자. 그렇게 의좋은 형제,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친구 간일지라도 타산에 얽힐 때면 아귀다툼을 일으키는 일은 어찌된 일인가? 필자가 지나친 판단이라면 참 좋겠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책임져야 한다. 결코 남이 책임져 주지 않는다.
인간의 혼(魂)을 오염시키는 것은 뭘까? 그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욕심이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약 1:15)라고 했다. 우리가 되찾아야 할 시급한 문제는 자기 영혼을 지키는 일이다. 다시 말해 비인간화와 싸워 인간답게 사는 일이다. 이 문제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오랜 세월 동안 귀가 따가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주장해 왔다. 그런데도 오늘날에도 절실히 이루어야 할 문제이기에 다시 재론하는 것이다.
오늘날처럼 복잡하고 시끄러운 사회 속에서 제정신을 잃고 떠밀려 살아간다면 어찌될까. 빈껍데기 속물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닐까? 이에 자신이 자신을 조용히 반성해 봐야 한다. 여가를 즐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는가.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한가로운 시간’을 생각할지 모르나 여기서 말하는 여유는 ‘여유로운 마음가짐’을 말하는 것이다. 자기의 정신을 집중시키려면 무엇보다도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 옛 속담에 “호랑이가 물어가도 제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제정신이란 뭘까? 근본적으로 말하면 마음의 여유다. 아무리 다급한 일을 당해도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모든 일을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요즘 어디를 가든지 시끄럽다. 버스를 타도, 전철을 타도, 모임에 가도 코로나19로 인하여 경제가 말이 아니라서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고 특히 요즘 서울시장·부산시장 보궐선거 기간이라서 더욱 시끄럽다. 일찍이 보고 느끼지 못했던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다보니 눈만 뜨면 귀가 따갑다. 신문, 잡지, 텔레비전, 스마트폰 문자 등 대중매체가 정신마저 혼란하게 한다. 이것들은 엄격하게 선별되지 않고 마구 쏟아져 나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자들 역시 거르지도 않고 씻어내지도 않은 채 남이 전달해 온 그대로 자기도 남에게 또 전달한다. 그 이유는 뭘까. 지성이 부족해서일까? 상당한 학벌이 있는 자들도 그 부류들과 합류하고 있음을 종종 본다. 그것은 그들에게 감염된 탓이다. 양식이 부족한 탓이다.
그렇다고 이런 일을 누가 이래라 저래라 낱낱이 간섭할 수 없다. 자기가 자기의 정신을 가다듬어야 한다. 스스로 교육시켜 능력을 길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올바른 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다.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난 것은 생각할 수 있고 자기 자신을 교육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못하면 모든 자아(自我)가 붕괴된다. 지난날의 공적인 것도 사적인 것도 모두 붕괴되고 만다. 그럴 때 인격과 생명의 존엄성이 파괴되고 마침내는 종지부를 찍고 만다.
오늘의 사회가 병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참으로 큰일이다. 병원체를 찾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병균이 코로나19처럼 무수한 인간을 무차별하게 마비시키고 만다. 그뿐인가. 모든 사람을 흡수해 버리려는 병원균을 그들은 가지고 있다. 이를 빨리 박멸시켜야 한다. 그것을 박멸시킬 치료방법은 뭘까. ‘삶의 여백’이다. 이것이 치료백신이다. 내 정신을 내가 지키고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이다. 오직 이 길만이 사회와 국가와 인류를 위한 길이다.
하재준 장로
<수필가·문학평론가·중동교회 은퇴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