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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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위량의 제 2차 순회 전도 여행 (61)

구미에서 상주까지 (9)

배위량이 구미에서 상주 낙동까지 걸었던 길을 따라 걷기 위하여 구미에서 상주 낙동으로 향하는 길을 걸었다. 구미시 해평면에서 상주시 낙동면(洛東面)으로 가기 위하여 해평들을 지나 낙동강 동안(東岸)에 있는 언덕길을 따라 걸었다. 가도가도 낙동강(洛東江)이 눈에 들어온다. 낙동강 양쪽으로 넓은 들이 펼쳐져 있고 그 들 뒤에 우람한 산들이 줄지어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호위하듯 서 있다. 낙동강은 영남 사람들에게 보고(寶庫)와 같은 귀중한 강이다. 영남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낙동강과 관련된 삶을 살아간다. 조재문은 ‘낙동강 수계의 환경관광개발에 관한 탐색적 연구’란 논문에서 낙동강의 수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낙동강유역의 수리적 위치로서 최북단은 강원도 태백의 금대봉(37° 13’N)으로 경상북도와 강원도의 경계에서 약 12km 거리를 두고 있는 태백산맥의 산간지대이며, 최남단은 부산시 낙동강 하구둑(35° 06’N)으로 담수와 해수로 구분되어 있고, 최동단은 경북 청송군 부동면 이전리의 주산천 상류(129° 13’E)이다. 또한 최서단은 전북 남원시 운봉읍 장교리(127° 29’E)이다.

낙동강을 삶의 바탕으로 살아가는 영남지역 사람들은 낙동강과 밀접하게 얽혀 있다. 낙동강 수계의 상류, 중류 그리고 하류를 대상으로 한 김수정와 조철기의 ‘현대시를 통한 낙동강 수계 지역의 지리적 이미지 연구’란 논문에 보면 낙동강 상류, 중류 그리고 하류를 대상으로 한 시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공간적 배경을 상 중 하류로 나누어 살펴보면 상류는 낙동강 발원지로 알려진 황지를 비롯하여 안동 지방에 관한 시가 가장 많다. 낙동강 본류가 시작되는 상주부터 고령 합천 지역을 포함하는 중류권을 대상으로 하는 시는 대개 수질오염 자연재해 지명 인구분포 등 다양한 현실을 반영하는 작품들이다. 낙동강 하류 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시가 가장 많으며 이 지역은 을숙도 주남저수지 우포 등을 포함하고 있어 생태문제나 환경오염에 관한 시가 많다. 낙동강 상류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시는 지역개발로 인한 폐해나 수질오염 문제 등에 대한 현실 비판적 시보다는 아름다운 지형이나 시인 각자의 소감을 노래한 시가 더 많다. 이에 비해 중 하류 지역에서는 현실을 반영하고 사회비판적인 시가 많이 발표되었다. 이것은 낙동강 상류 지역에 비해 중류나 하류 지역에 대도시가 많이 분포해 있고 강이라는 지형이 하류 쪽으로 갈수록 오염도가 심화되기 때문일 것이다.

위에서 보다시피 낙동강은 현대 시에서도 중요한 소재가 되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낙동강은 영남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한국 민족에게 중요하고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역사상 전쟁이 남긴 상흔이 역사의 굽이굽이 마다 남아 있다. 가장 최근의 일은 6.25전쟁이다. 보수와 진보의 다툼 속에서 6.25는 잊혀진 전쟁이 되고 말았지만, 엄연히 한국 역사의 굵은 획을 그었고 지금도 그 아픔의 흔적은 사람들의 가슴에 응어리를 남겨 아픔을 더하고 있다. 사람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지만 전쟁은 늘 있어 왔다. 오늘, 즉 2021년 3월 27일, 뉴스에 중국 공군이 전투기, 폭격기, 조기경보기, 정찰기 등 군용기 20대를 이끌고 대만 방공식별구역(ADIZ)에 진입하여 무력시위를 벌인 것에 대한 보도가 나왔다. 인류 역사 이래로 역사상에는 크고 작은 전쟁이 이어져 왔다. “전쟁은 국가의 주권과 개인의 생사를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현상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인명 피해가 나고 그뿐만 아니라, 많은 재산 피해를 보게 되고 문화유산도 많이 파괴된다. 그래서 인류는 전쟁의 참혹함을 알기 때문에 전쟁을 피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해 왔다. 하지만 인간과 전쟁은 숙명적인 관계처럼 엮어져 있다.
북한군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38도선 전면에서 기습적으로 남침함으로써 6.25전쟁이 일어났다. 북한군의 침략으로 시작된 6.25전쟁이지만 지금도 북한뿐만 아니라, 일군의 남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한국군이 먼저 전쟁을 시작했다는 반대 의견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만약 국군이 북침을 했다면 아무런 대비도 없이 전쟁을 시작하고 그렇게 삽시간에 휴전선에서 수도 서울까지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북한군이 남침한지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었다. 20만 명이나 되는 북한군은 우수한 무기로 무장하였지만, 당시 한국군은 겨우 9만 명에 불과했고 더욱이 무기도 북한군에 비해 열악했다. 수적으로 절대 열세였던 국군은 북한군에게 파죽지세로 밀려 남으로 남으로 내려왔다. 6.25전쟁은 1950년 우리 민족에게 가장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동족상잔의 전쟁이다.
6월 26일 유엔의 소집과 28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의 참전 결의에 따라 7월 5일 미국의 스미스(Smith) 부대가 처음으로 참전하여 오산 부근에 투입되었고 7월 7일에 유엔군이 창설되어 16개국(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네델란드, 캐나다, 뉴질랜드, 프랑스, 필리핀, 터키, 태국, 그리스, 남아공, 벨기에, 룩셈부르크, 콜롬비아, 에티오피아)에서 보낸 34만 1,000명이나 되는 유엔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진정되면서 나중에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하여 북한군과 대치했다. 그것은 서울을 빼앗긴 한국군은 오산전투, 평택전투, 대전전투 등에서 패하여 낙동강에서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최후의 보루로 사수하기 위하여, 모든 병력을 낙동강 인근 지역에 집중한데 따른 전선이었다. “6.25전쟁 당시 낙동강방어선전투는 1950년 8월부터 9월 중순까지 마산-왜관-포항지역을 잇는 선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이 한 덩어리가 되어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냄으로써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조국을 지켜낸 전투였다.” 낙동강에 최후의 보루를 구축하기 위하여 “8월 1일부터 9월 15일까지 46일 동안의 치열한 전투에서 아군이 승리함으로써 전세는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되었다.”
6.25전쟁의 낙동강 방어선에서 경상북도에서 이루어진 전투는 1. 왜관, 다부동 전투, 2. 신녕전투, 3. 영천전투, 4. 기계, 안강전투, 5. 경주 북방전투, 6. 포항전투, 7. 장사상륙작전 이다. 이 7개의 전투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이 승리함으로써 백천간두의 위기 앞에 섰던 대한민국의 운명은 새로운 시대를 향해 열리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낙동강은 영남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겨레의 전통성과 운명을 지켜준 생명의 젖줄이었다. 낙동강은 영남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길과 길을 이어주고 사람과 사람을 모여들게’ 하고 ‘장터를 열어 여러 먹거리와 살림에 필요한 온갖 물건을 바꾸면서’ 살아가는 터전이다. 『낙동강 옛나루. 낙동강 지류의 소금뱃길』의 저자 김봉우는 낙동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낙동강은 영마루 아래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명줄입니다. 어머니강인 것입니다. 그 강가에 모여 둥지를 틀어 ‘큰 땀(담),’ ‘작은 땀,’ ‘웃마,’ ‘아랫마’ 등으로 불러왔습니다. 이들 ‘땀’이나 ‘마’ 등은 삶의 터를 같이하는 작은 공동체로 ‘마실(마을)’인 것입니다. 낙동강 가에 ‘마실’을 이루면서 사람들은 배를 띄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낙동강을 건너다니기도 하고 아래위로 오르내리면서 살아왔습니다. 배를 띄우기 시작한 터를 ‘나리(나루터)’라 불렀습니다.

영남 사람의 젖줄인 낙동강은 한때 온겨레의 최후의 방어선이었고,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기에서 민족을 구했고, 많은 사람들의 영혼의 고향으로 시와 노래의 터전이었다. 낙동강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먼 지역까지 물건을 실어 나르던 돛단배도 강 양안(兩岸)으로 사람들을 실어 나르던 작은 나룻배, 나루터 그리고 뱃사공은 보이지 않지만 배위량이 이 강을 건날 때 사공의 도움으로 나룻배로 건넜을 텐데, 그는 나루터에서 배를 기다리는 동안 그리고 나룻배로 강을 건널 동안 무엇을 생각했을까?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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